도보 10분 거리에 수영장이 무려 3개나 있다. 강습 자리는 늘 없다. 이 동네는 누구 하나 죽어야 강습자리가 난다고 했다.
동네 주민의 탄탄한 생명력을 확인하며 기계적으로 새로고침을 누르는데 갑자기 누가 죽었? 다. 내게도 수영 초급반 카드가 생겼다.
초급반에서 내 문제는 팔이었다. 힘찬 팔 돌리기가 필요한데 나는 힘찬 어깨라고 했다. 잠깐동안 어깨와 팔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 아니잖아. 팔을 힘차게 돌리려면 어깨 힘도 있어야지!라고 혼자 생각했다.
“어깨에 팔이 붙어있으니 다들 몰라요. 그냥 몸이 느껴야 해요. 어깨만 힘주셔서 자꾸 사선으로 가시는 겁니다.”라고 강사가 말했다. 계속 중앙선을 넘는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팔만 힘차게’를 굳게 다짐하고 구리게 실패했다.
2022년 말은 코로나 후 처음 맞는 연말다운 연말이었다. 각종 모임으로 식당 예약이 어렵다나. 12월 30일 저녁 8시 수영장 출석이란 어쩐지 사회적 고립감의 증명 같았고 나는 굳이 증명을 해냈다. 강습마저 없는 자유수영 날이었다.
수영신神이 있(을리 없지만)다면 사회적 고립자 몸치에게 긍휼한 마음을 품나 보다.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는 이 날 똑바로 갔다. 힘 뺀 어깨와 힘찬 팔의 조합을 몸이 알아버렸다. 알아버린 몸은 레일 끝까지 쉬지 않고 가는 재주도 부렸다. 사회적 고립은 수영적 선물이 됐다.
수영 강사와 김싸부는 연말과 정초에 기둥을 하나씩 세웠다. 글쓰기도, 수영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자주’ 해서 몸이 느껴야 한다는 거대한 전제였다.
기둥 사이에 묶인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치를 썼고 오늘치 수영을 챙긴다. 오늘치를 써도 내일 쓸 게 없을 테고 오늘 자유형이 됐어도 내일 배영으로 물배를 채우겠지. 아우, 다 그만둬! 하다가 그들이 세운 기둥을 어쩌지 못하고 모레 또 똑같은 짓을 할 거다. 나 같은 주민 때문에 ‘누가 죽어야 자리 나는’ 동네가 됐나 보다.
그런 동네 기를 받아 ‘음감이는 죽어야 그만 써.’ 도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