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이를 만났다. 잠실 전철역 앞 길거리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거의 이십 년 만에 상봉했다. 너무나 반가웠다. 이마에 주름살은 많이 늘었지만 얼굴 모습도 말투도 제스처도 예전과 똑같았다. 말할 때마다 “얘, 경숙아”, “경숙아”를 붙이니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마치 50년 전, 고등학교 같은 반 앞뒤로 앉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프랑스나 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나와 내 주변의 친구들은 많이 변했는데 그들은 옛날의 순박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친구 영민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좁은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격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가느라 안간힘을 쓴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넓은 땅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온 탓이리라.
영민이는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 일본에서 8년 정도 살았다. 남편이 본국으로 발령을 받자 프랑스의 대도시에서 살게 되었고, 그곳 국제 학교에서 일본어 전임 교사가 되었다. 일본인을 제치고 한국인이 전임 교사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학교는 일본 고등학교와 국제 교류 사업을 했다.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학생들을 일본 학교로, 일본에 있는 학생들을 프랑스로 오게 해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문화 체험도 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한다고 했다. 그런 시스템의 물꼬를 튼 사람이 바로 내 친구 영민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방학 때마다 프랑스 학생을 일본으로 데려가며 30여 년간을 너무나 바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일이 좋아서 전혀 힘든지도 몰랐단다. 그러면서도 딸과 아들을 유능한 인재로 키워낸 열혈 엄마이다. 이제 퇴직을 하고 시부모님이 사시던, 대도시 근교 한적한 교외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엄청 바쁜 삶을 살았기에 이젠 자신에게 여유롭게 즐길 시간을 줄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한국의 꽃씨와 채소 씨를 가져와 텃밭에 심어 놓고 남편은 채소를, 자신은 꽃을 가꾸고 있단다. 결혼 후 오랜 세월을 불어와 일어만 사용한 탓인지 정작 우리나라 말을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다시 공부하는 중이란다.
그녀에게 37일간의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계획을 알렸다.
“프랑스에 오면 꼭 우리 집에 들러서 며칠 자고 가도록 해.”
“미안해, 일행이 있어서 그럴 수 없어. 반나절만 있다가 갈게.”
“얘는~ 난생처음으로 우리 집에 와서 반나절만 있다가 가면 내가 무척 서운하지. 일정을 좀 바꿔봐.”
연신 계획을 바꿔 보란다. 이미 항공편과 숙소, 차, 일정 모두 확정된 거라 바꿀 수 없다고 하자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두서없이 나누었다. 그러다가 3월 26일, 프랑스 그녀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순박한 모습의 영민이와 꿈 많던 여고 시절의 우리들 모습을 떠올리면서 마냥 행복했다.
그녀와의 프랑스에서의 재회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