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커튼을 열다 마주친 세상!
흰 눈 이고 있는 뾰족 지붕과 나뭇가지마다 활짝 핀 눈꽃,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희끗희끗 눈을 덮고 있는 양자산,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다. 마치 내가 동화 속 나라에 와 있는 듯 행복했다.
어릴 땐 눈 오는 게 그저 좋았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강아지처럼 동네방네 뛰어다녔다.
혀 내밀어 눈을 받아먹고 쌓인 눈 위에 발자국 꽃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친구들과 신나게 눈싸움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눈밭 위에 드러누워 뒹굴기도 하고 눈을 뭉쳐 과자인 양 먹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잃은 탓일까?
언젠가부터 눈이 마냥 달갑지만 않다.
흰 눈이 내리면 순간 반갑다가도 곧바로 불편감이 밀려온다.
눈으로 덮인 세상은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녹을 때의 세상은 왜 이리도 질퍽거리고 지저분한지....
걸어가다 미끄러져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도로에서의 정체는 짜증을 부르며
눈길에 교통사고 날까 조바심이다.
감상도 잠시 눈 치우기가 만만치 않다.
몇 주 전에도 엄청난 폭설로 낑낑대며 눈을 치웠다.
그땐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무 가지들이 부러지고 가녀린 남천나무나 사과나무, 라일락 나무는 줄기째 휘어져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무 위의 눈을 털어내고 눈에 파묻힌 가지를 세워 주며, 집 안팎의 눈을 치우느라 엄청 힘들었는데.... 오늘 또 눈을 치워야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차도 마신 후 남편과 함께 눈을 치우러 나갔다. 눈이 많이 온데다가 수분을 가득 품고 있어서 무척 무거웠다. 힘겹게 삽질해도 눈이 삽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눈이 힘에 부쳐 제대로 치울 수 없어 씨름해야 했다. 지난번엔 춥지 않았는데 오늘은 매서운 바람까지 불었다. 얼마 치우지도 못 했는데 손, 발, 귀가 시리고 어깨, 팔, 허리가 아팠다. 그러지 않아도 아픈 허리라 치료 받고 있는데.... 으~ 감상과 노동을 제공한 눈이 나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인가?
우리 집 울타리를 빙 둘러싼 일차선 도로 덕분에 쓸어야 할 공간이 꽤나 많다. 우리 집 옆 공터 앞 도로도 우리가 치워야 할 몫. 게다가 그 공터 옆집은 겨울이면 서울에서 상주하는 분들이라 우리가 눈을 치워주곤 한다. 이분들은 눈만 오면 눈길을 헤집고 온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빈 집이란 게 바로 티가 나기 때문이다. 집에 온기가 없어서인지 그분들은 눈을 쓸자마자 곧바로 가버린다. 눈길에 왕복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 우리가 치울 테니 내려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내려온다. 어떨 땐 우리가 자고 있는 새벽에 와서 쓸기도 하고 어떨 땐 우리가 거의 다 치울 즈음 오기도 한다. 한참 눈을 쓸고 있는데 오늘도 예외 없이 이분들이 와서 같이 눈을 치웠다.
처음엔 우리 집 앞 치우기도 힘든데 옆집 앞까지 치워야 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이집 부인이 미안하고 고맙다면서 직접 뜬 털 모자와 장갑을 내게 선물했다. 속으로 툴툴거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댓 발 나왔던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집에서 구운 빵과 케이크를 갖다주고서야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집 남편분은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 남편 절친의 대학 친구이다. 같은 대학, 같은 나이라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같은 과 동기라고 했단다. 우린 모두 깜짝 놀랐고 세상 참 좁다는 걸 실감했다. 그 후로 우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있다.
서로 배려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눈만 오면 우린 재회한다. 두 집의 합작으로 깔끔하게 치워진 도로와, 도로 양옆으로 높게 쌓인 눈이 살맛 나는 시골살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정이 있어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