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파데이 Apr 04. 2022

무력의 봄 (1)

01. 무력의 봄



만년 무기력 환자인 내게 들뜸이 가득한 봄은 어딘가 좀 부담스러운 계절이었다. 하지만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지만 일 년의 시작으로 여기기도 하는 동지에 태어난 내게 새싹이 움트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봄은 운명이었을까.

내 눈엔 늘 싱그럽고 화사하고 포근한 딸, 하이는 3월생 봄의 아이고

나, 너에서 우리가 된 내 가족의 새로운 시작 또한 봄에 찾아왔다.


기상-취침이 6to8인 꼬미 덕에 일찌감치 씻고 잘 준비를 하던 18년 3월 저녁. 나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한통 받는다. 전화 올리 없는 시간에 온 전화라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나쁜 일이 아닐까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B시 경찰서 누구라고 소개한 분은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으로 내게 남편의 이름을 말하며 교통사고 때문에 남편이 A병원 응급실에 있으며 사고 접수를 해야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사고. 그건 정말 글자 그대로 전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사고 고지로 나는 순간 정말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이게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서 보이스피싱 의심 때문에 불러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들려온 소리는 짧게 어이없다는 듯 웃는 소리였다. 야트막하게 헛웃음을 치며 담당자는 내게 직접 병원에 전화해서 확인해 보고 다시 전화를 주라고 했다.

당시 남편은 B시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뜬금없는 A시 응급실 이야기에 나는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하면서도 덜덜 떨며 A병원 응급실을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고로 응급실에 온 게 맞단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태가 어떠냐니 개인 정보 때문에 상태를 설명할 수는 없고 의식은 있으니까 보호자면 빨리 오라는 대답만 들었다. 우리 집은 C시로 A시 병원까지는 1시간 남짓. 나는 온몸이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친정부모님께 전화해 아이를 동생에게 급히 맡기고 병원으로 갔다.


남편은 당시 가게 운영 중으로 배달 건 중에 음료수가 빠졌다는 연락이 와서 마침 가까운 곳이고 음료수 하나를 또 비용 지불해서 보내기 아까워 가게에 놀리고 있던 배달용 오토바이를 직접 타고 나섰다고 했다. 

그날은 내내 비가 왔었고 비가 그친 직후. 남편은 직진 신호를 보고 쭉 달려오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시도하던 차에 부딪혔다.


칸막이 하나 없이 작고 조악한 침대에서 목보호대 하나 하고 누워 남편은 내게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보호자라는 말에 의사는 척추와 목뼈가 부러졌고 뇌출혈이 있다고 했다. 

한쪽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하염없이 대기하는데 일단 두피 찢어진 곳을 봉합한다고 대기한 지 3-4시간 만에 응급실 한쪽 처치실로 침대째 남편을 옮겼다. 그곳은 말이 처치실이지 비품 보관창고 수준이었다. 잠이 가득한 눈으로 봉합하러 온 의사는 각이 제대로 안 나온다며 남편더러 일어나 앉으라고 했다. 


거주 중인 C시에 있는 여느 병원보다 열악한 응급실 환경. 기다리다 지쳐 처치 진행 상황을 묻자 아침이나 돼야 교수님들이 보고 수술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 척추가 부러졌는데 환자가 소변이 마렵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냐 묻자 저쪽에 화장실 있으니까 쓰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던 간호사의 대응. 

그 모든 상황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던 나는 척추와 목뼈가 부러진 사람에게 꿰매야 하는데 각도가 안 나오니까 일어나 앉으라고 한 말에 완전히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남편의 매형인 아주버님이 여기에서 계속 이대로 시간만 흘려보내느니 외상센터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다. 바로 의사에게 의견을 피력하니 아주대학교 외상센터에 연락을 해주셨고 다행히 자리가 있어서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남편을 바로 이송할 수 있었다.


외상센터 중환자실. 뉴스에서나 가끔 접했지 나는 내게 이곳에 와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 신새벽. 새하얗게 눈부신 조명과 소름 끼치게 조용하던 적막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남편은 미리 대기 중이던 의료진에 의해 처치실로 바로 옮겨졌고 A병원에서 받은 검사기록을 아주대 외상센터까지 이송시켜주신 응급구조사분이 기계에 업로드해주셨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 


나는 그때 하필 생리 이틀 째로 뭘 챙길 새도 없이 나와 있었고, 축축한 느낌이 꺼림칙해서 화장실에 가니 빌어먹게도 생리대는 제 기능을 완전히 잃고 피가 흥건해 바지까지 조금 젖어 있을 정도였다. 비 오는 날 생리 이틀째인데 생리대 여분 하나 없이 6시간 넘게 밖에 있다? 눈물이 안 날 수가 없다. 사실 과장 좀 보태서 살인 안 나는 게 다행 아닐까. 엉덩이를 가리는 긴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에 나는 훌쩍이며 접수대 직원분에게 편의점 위치를 묻고 다녀왔다. 


건물 내에서 내로 이동하는 길이었지만 꽤 멀어서 시간이 좀 걸렸는데 화장실에서 수습을 하는 새 남편의 누나에게 면회하라는데 어디 있느냐고 전화가 왔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도 뭐한 일이라 그냥 금방 간다고 전화를 끊고 갔는데 다들 별로 표정들이 좋지 못했다. 대기실로 오자마자 너는 대체 어디를 가서 안 오냐는 핀잔을 들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는 이해가 아니라 오래 자리를 비워둔 것에 대한 언짢음이라 나는 다소 황당했다. 

그럼 내가 사고로 입원한 남편을 내버려 두고 도망이라도 갔을까. 

누나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엔 매형들도 있었기 때문에 구구절절 얘기하기도 싫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한참 후에, 나 없을 때 남편에게 와서 그때 내가 그랬다고 흉을 보고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냥 바지까지 젖을 정도로 피가 새서 생리대 사서 갈고 왔다고 이야기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되돌이켜 보니 참 사소한 데서 억울한 감정이 북받치지만, 그때는 그저 다른 감정을 느낄 새 없이 그냥 경황이 없었다. 


외상센터 중환자실에서 본 남편은 두피의 열린 상처 때문에 머리는 박박 밀렸고 쓸린 상처 여기저기에 반창고를 붙이고 청결하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었다. A병원 응급실의 좁고 작은 침대에 겨우 누워서 목 보호대만 한 채로 덜렁 누워 있던 것과 확실히 달랐다. 외상센터 중환자실에서 필요한 처치를 받고 난 남편을 보고 처음 받은 느낌은 안도였던 것 같다. 이제는 안전할 거라는 느낌.

순간 눈물이 너무 나서 내가 흐느끼니까 간호사 선생님은 괜찮다고 다독여주시고 곧 담당 선생님이 오실 거라고 했다. 담당의라고 소개한 의사 선생님은 내게 사진을 보여주며 남편이 다친 곳에 대해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적절한 비유를 사용해 설명해서 이해시켜줬다.

그렇게 면회가 끝난 후 나는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남편이 외상센터 중환자실에 있을 동안 필요한 물품 리스트를 받아 밖으로 나왔다.

아이 때문에 엄마가 가고, 남편의 시댁 식구들 또한 돌아갔다. 바로 2-3 시간 뒤에 있는 아침 면회 때문에 병원에 남는 나를 위해 아빠가 대기실에서 같이 기다려 주셨다.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일지 모르지만, 뭔가 일단락된 것처럼 느껴지던 비 내린 새벽의 그 서늘한 온도와 냄새가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완연한 봄을 알리는 싱그러운 봄비 속에서 불안과 안도. 양립할 수 없는 감정으로 나는 그저 혼란하고 먹먹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