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와, 너무 좋다. 경치도 공기도... 이런데 살면 신선이 된 것 같겠어요.라는 반응과
이런데 어떻게 살아. 불편해서. 나는 절대 못 살아. 하는 반응이 그것이다.
물론 두 번째 반응이 더 많은 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처음 남편이 이 산속에 살자며 터를 닦아 놓고 나를 안내했을 때,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에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뭐야! 도대체 언제까지 올라가는데?
이런데 길이 있다니.. 이런 첩첩산속에 포장된 길이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애들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산길이 포장이 돼 있는 게 놀랍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이 산길이 포장만 돼있지 않았어도 여기 들어와 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포장된 길이 있어야만 건축허가가 난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경악 속에서 힘들게 올라 와 바라본 경치는, 왜 남편이 여기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는지 한 순간에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첩첩이 겹쳐 보이는 맞은편 산들은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펼치고 있었고 산들 틈새로는 멀리 흐르는 강줄기가 보였다. 뒤로는 울창한 숲과 산에 에워싸서 마치 요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어느새, 살면 사는 거지 뭐. 하는 맘으로 바뀌어갔다.
어느 곳, 어떤 환경에 던져놔도 잘 사는 여자. 적응의 아이콘. 그게 나 스스로가 나에게 내린 평가다.
처음 집을 떠나 본 것은 졸업 후 발령을 받아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였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지는 걸로 나의 기나 긴 이주자의 삶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에는 잠시 경기도에 신접살림을 차렸다가 서울로 이사해 작은 아파트에서 첫애를 낳았다. 애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기어이 양수리 강가에 집을 짓고 또 이사를 했다. 경치 좋은 유원지라 주말이면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종일 믹스커피를 타서 대령해야 했지만 강가에서 사는 삶도 나쁘진 않았다.
그 후에는 '강릉산수갑천하'라며 빼어난 자연 풍광을 뽐내는 강릉에서도 십 수년을 살았고 중국까지 날아가 8년 가까이 살았다. 그 보다 훨씬 전엔 파리에서도 몇 년간 지낸 적도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찍소리 없이 잘 적응해 살았던 것 같다. 닥치면 살아내야지 별수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적응력을 발휘해 나름 즐거움을 찾아 지내왔다고 자부해 본다.
그런 내가 이 산속이라고 적응 못할 이유는 없겠지. 사실 적응이라 할 것도 없었다. 막상 산속에 눌러앉고서야 아무도 없는,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는 이 환경이 너무나 내 적성에 잘 맞는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으니까.
사계절도 모자라 매일매일 변화무쌍한 자연의 입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가 않다.
맑으면 맑아서, 안개 끼면 선녀가 된 것 같아서, 눈이 오면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렇게 실컷 경치 구경하라고 통창을 두 개씩이나 뚫어놨나 보다.
외롭지 않냐 무섭지 않냐 물으면 그냥 웃는다. 무서운 건 사람이지 적막도 산짐승도 아닐 테니까.
여태까지, 도시, 시골, 강가, 산속,내 나라, 남의 나라 살아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어디에 사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 거기서 거기다는 거다.
이 고장 자체가 이미 해발 300미터에 첩첩산중인데 거기서 400미터 더 올라온다고 뭐가 크게 다를까. 천만금을 줘도 나는 못 산다. 란 말엔 나도 대답을 생략하고 만다.
처음엔 운동한답시고 그 400미터를 걸어올라 오는데 죽을 것 같았다. 숨이 차서.
지금은 가뿐하게 올라온다. 장족의 발전이라고나 할까.
가끔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으러 올까 봐 염려스럽지만 몸만 산에 있지 거의 매일 인터넷 쇼핑에 택배로 생필품을 조달받으니 양심상 자연인은 못 찍을 것 같다.
오늘은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불편하고 일도 많고 남들 보기에 심각하게 외로워 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이 산속생활을 어느덧 나는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랑하고 있는지도...
나는 적응의 아이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