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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10시간전

세월을 거꾸로 산다.

'내기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노. 두고 봐라. 내년엔 절대 이  안 한다.'


배추를 다듬으며 그 결심을 백 번도 더 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배추를 밭에서 뽑을 때부터 이미 체력의 한계가 감지되었다. 쑥쑥 잘 뽑히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죽어라 버티는 것들도 있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정 안 뽑히겠다 발버둥을 치는 것들은 놔두고 내게 몸을 맡기는 것들만 뽑아 크기대로 나란히 줄을 세웠다.

막상 뽑아 놓고 보니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았다. 그 많은 것 중  알이 단단하게 앉아 김장배추감으로 합격인 건 불과 10 포기도 되질 않았다. 나머진 푹신푹신하거나 거의 얼갈이 수준이다. 지난여름이 너무 위대했고 너무 길었던 탓에  누렇게 떠서 주저앉았다가 시원해지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라느라 몸집을 키울 여력이 없었나 보다. 그런데도 가물어서인가 쉽게 뽑히질 않았다.


"남은 건 자기가 뽑아요. 난 못하겠으니."


남편이 오더나 너무 쉽게 뽑는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잘만 뽑히네.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진즉에 요령 좋은 사람에게 다 시킬 걸 그랬네.

배추는 상태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고 골고루 박스와 포대에 담아 형님댁에 갖다 드릴 것부터 놓았다. 형님이 배추 모종을 사 주신 터라 나눠드리는데  제법 신경이 쓰인다. 좋은 걸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몽땅 다 좋은 걸로만 보내기엔 나도 김장을 해야 하기에 최대한 골고루 어 넣으려고 애를 썼다.


텃밭 언저리에 앉아 대충 배추를 다듬었다. 억센 겉잎을 뜯어내고 뿌리를 자르고...

늦가을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날을 잘 잡았.

다듬은 배추를 집 안까지 옮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흘깃 남편 눈치를 보니 난로 연 갈이에 혼을 빼고 있었다. 3개 다 오늘 갈아 치울 모양이. 할 수 없지. 혼자 작은 수레에 실어 여러 번 들락거는 수밖에.


집 안에 들여놓고도 일은 계속된다. 겉잎과 꼬다리를 정리하고 두 쪽으로 쪼갠다. 은 시퍼렇고 억세도 속잎은 아주 샛노랗다. 부실해도 맛은 있을 것 같다. 배추가 작으니 푸른 잎도 최대한 버리지 말아야지.

큰 포기만 골라 개고 작은 것들은 신문지에 둘둘 말아 한쪽으로 밀쳐둔다. 완전 체력이 바닥났다는 느낌이다.


"요새 이렇게 김장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모두 절여 논  배추  사서  담근다고. 아이고, 이게 뭔 고생이여. 내년부턴 절대 김장 안 해!"

"하지 마. 안 하면 되지 왜 투덜 대"

공감 능력이라곤 1%도 없는 남편의 반응이다.

"아예 배추를 안 심을 거야. 국거리로 딱 10 포기만 심든가"



저녁을 먹은 후 배추 절이기에 돌입했다. 소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이번 한 번은 쓸 수 았겠지. 바닥을 치는 소금을 보니 심술이 났다. 멀쩡하게 잘 있던 소금 한 포대를 말도 없이 들고나가 친구에게 주고 온 사람이 있다. 왜 그랬냐니깐 우리 집에서는 안 쓰는 줄 알았단다. 세상에나, 소금 안 쓰는 집이 어딨 다고. 20키로면 몇 년은 쓸 텐데. 요즘 소금값이 얼마나 비싼데...


소금은 걍 기분 내키는 대로 적당히 푼다. 소금물에 퐁당퐁당. 중간 잎새에도 살짝씩 소금알갱이를 뿌려 준 다음 통에 차곡차곡 눕히지 않고 세워놓는다. 밑동이 아래로 가게. 작년에 너튜브에서 운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한 중에 일어나 배추를 위아래 뒤적이며 위치를 바꿔 줄 필요가 없다. 

남편이 나와 보더니, 아직도 해? 하며 놀란다. 몸살 나겠어. 하자 그제야 진 몸살 나겠단다.


세월을 거로 살고 있다.

젊었을 때. 집집마다 배추를 사서 절이고 김장 담글 땐 김장할 엄두도 못 내고 얻어먹거나 시어머님이 오셔서 해 주시거나 사 먹거나 하다가 이제 집집마다 절인 배추를 사서 양념만 버무리거나 사 먹을 때 뒤늦게 나만 배추를 심고 가꾸고 뽑고 절이고 풀 코스의 김장 가도를 달리느라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세월을 역행해서 산다는 생각에 모든 과정이 더 힘들게만 여겨진다.


손이 부어 주먹 쥐기가 불편하다. 내일은 새벽같이 일어나 배추를 씻어놓고 양념을 준비해야지. 아직 텃밭에 있는 파, 쪽파, 갓도 뽑아서 다듬어야 하고 무도 채쳐야 하고 김치통도 다 씻어야 하고... 일이 끝이 없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오손도손 의논해 가  일도 쉽고 재미도 있을 텐데...


두고 봐라. 내년엔 절대 이 노릇 안 할 테니. 나도 농협에 가서 절인 배추에 만들어 놓은 양념에 그냥 쓱쓱 버무리기만 해서 들고 올 테니까. 

사람이 시대에 맞게 살아야지. 뒷북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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