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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 23종

by 세실

텃밭에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다른 집들은 이미 모종 심기를 마무리했을 시기지만 해발 700미터 우리 집은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모종 심기에 딱 알맞은 시기지 싶다. 더구나 올핸 웬일인지 하염없이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어 그 어느 때보다 긴긴 봄날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해마다 5월이 되기 무섭게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펼쳐지곤 하더니 이렇게 서늘하고 아침저녁으론 추위마저 느껴지는 요즘 날씨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이게 정상인지 헷갈린다. 집안에선 여전히 전기요와 스웨터를 걸쳐야 하는 5월이라니...

덕분에 일하기는 좋다. 한낮에도 너무 뜨겁지 않고 아침저녁 텃밭 돌보기도 크게 지치질 않는다.


남편이 쇠스랑으로 굵은 돌들을 골라내고 땅을 편편하게 고르면 나는 검정비닐을 길게 쫙 펼치고 바람에 비닐이 날아가지 않게 돌과 흙으로 가장자리를 눌러준다.

이제 몇 년 해 본 솜씨로 그 정도는 혼자서 거뜬히 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올핸 돌과 흙 대신 골과 골 사이에도 잡초가 올라오지 못하게 검정 부직포를 깔고 부직포와 비닐을 겹쳐 고정핀을 박아 주기로 했다.

해마다 잡초와의 지긋지긋한 전쟁에 완전히 백기를 들고 아예 잡초가 올라오지 못하게 원천 봉쇄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비닐을 펼쳐 흙 위에 덮고 비닐과 비닐 사이에 부직포를 깔고 군데군데 고정핀을 망치로 박아주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조금씩 텃밭이 검은색으로 덮여 가는 게 보이니 성취감도 있다.

그 바람에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나 보다. 돌과 흙으로 고정시키는 것보다 고정핀을 쓰는 게 한결 깔끔해서 보기도 흐뭇하다.


비닐 덮기를 끝내고 모종을 사러 갔다.

상추, 가지, 오이, 양배추, 고추 3종, 토마토, 방울토마토, 깻잎, 쑥갓, 옥수수, 고구마, 청경채, 곰취, 파프리카, 대파, 호박 2종. 거기다 양념으로 애플수박과 참외도 한 포기씩 심었다. 실패할 각오를 하고 실험적으로.

언뜻 대 농장이라도 이룰 만큼 품목은 많지만 모두 두 세 포기 소량으로 구매하다 보니 양은 많지가 않다. 토마토만 20 포기로 많은 편이다. 우리 집은 토마토 맛집이라 늘 토마토는 원 없이 따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하게 심는다. 척박한 산속 땅에서도 부지런히 열매를 선사하는 기특한 식물이다. 토마토는.

고추 3종류는 각각 3포기씩만 심기로 했다. 작년에 너무 많이 심어 빨갛게 마른 고추가 창고 냉장고에 아직 한 보따리나 남아 있기에 올핸

그저 풋고추로 따 먹을 정도만 심을 참이다.

대용량으로 산 옥수수와 고구마 심기는 남편에게 떠 넘기기로 혼자 정했고.


비닐에 구멍을 내고 종류별로 모종을 심었다. 다 자랐을 때를 가늠해 적당하게 간격을 띄어주면서 심는다. 흙을 파고 모종을 집어넣으며 무사히 안착해 잘 자라주기를 기도했다.

한꺼번에 다 심기가 힘들어 대파는 다음날 심기로 했다. 대파는 반 판이 기본이다. 반 판이라 해도 무려 144 포기. 쉽게 줄어들지 않는 작은 대파 모종을 기계적으로 심는다는 것은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땅이 남았다. 뭘 더 심을까. 작년에 심다 남아 냉동실에 넣어 둔 열무와 부추 씨가 떠올랐다. 비가 온다 했으니 부지런히 심어야지.

씨를 찾아 나오자 벌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열무와 부추 씨를 한 줄로 가지런히 심었다.

이것으로 모종 심기를 모두 끝냈다. 총 23종류다. 먼저 심은 감자까지 하면 24종.

아직도 할 일은 태산이다. 고추며 오이, 토마토는 일일이 지지대를 세워줘야 하고..


때맞춰 비가 종일 내린다. 내일도 비 소식이 있다. 봄비답게 세차지 않고 부슬부슬 내려서 다행이다. 모종들이 비를 흠뻑 마시고 부디 무럭무럭 잘 자라주기를,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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