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시현 Jan 15. 2016

포도 한 송이

입안 가득 퍼지는 어린 날의 추억

 태중에 있을 때부터 나는 고집이 셌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과는 반대로 꼿꼿이 서 있었다. 때문에 엄마는  한여름에 땀을 팥죽 같이 흘리며 아기를 바로 돌려  자연 분만하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한사코 아기는 거꾸로 있다 제왕절개로 세상의 첫 빛을 보았다.

 거꾸로 태어난 아기는 상대적으로 머리가 크고 다리가 약하다. 나를 눕혀 놓으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지 다리를 접어서 공중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아기가 다리를 내려놓지 않으면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해  엄마와 외할머니는 겁을 먹었다고 한다.


장남인 아빠와 장녀인 엄마 곧 양 집안의  첫아기라 걷지 못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기도를 하시며 밤이고 낮이고 아기의 다리를 주무르셨다. 그러자 아기는 살포시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못  걷기는커녕 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그런데 여전히 다리가  튼튼하지 못해 운동회 때 안 넘어지고 달리는 것이 유년 시절의 목표였다. 어린 시절 다리는 하얀 피부 위에 시퍼런 멍 자국과 모기 물린 검붉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입이 짧고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으니 살이 오를 리가 없었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통화 내용은 늘 " 아이를 좀 많이  먹여라"는 말씀이 주된 통화였다고 한다.


 방학을 맞아 경북에 있는 외가댁에 가면 불고기 , 잡채, 수정과 등 외할머니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식을 해두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우리 가족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저녁까지 든든히 먹고 다들 잠이 들면 외할머니는 새벽녘에 나만 몰래 깨우셨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데리고 가셔서 엊저녁에 정성스레 알아이 씻어서 접시에 담아둔 귀한 캠벨 포도 한 송이를 꺼내신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끌려 나와 식탁에 앉아서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마치 아기 새처럼 한 알 한 알  받아먹었다. 포도가 가지만 남을  때까지 , 외할머니는 곁에 앉으셔서 등을 어루만지시며 천천히 먹으라며 포도를 다 먹이시곤 하셨다.


 다른  가족들 모르게 외할머니는 포도 한 상자를 다 먹여서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새벽마다 깨우셨던 것이다. 어린 날에는 그저 멋 모르고 먹은 포도였는데, 아직도 그때 그 포도만큼 맛있는 포도를 먹어 본 일이 없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 외할머니 장례식장에 앉아 있다 식사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포도를 보고 엄마에게 말했다.


" 엄마 나한테만 외할머니가 새벽에 항상 포도를 주셨었어"  그러자  엄마가 " 왜 포도를 주셨는지  아니?"라고 되받아 물으셨다.  "몰라... 그러고 보면 왜 포도 지?"


엄마는 말했다. " 외할머니는 포도를 포도당이라고 생각하고 널  튼튼하게 만들려고 지극 정성으로 먹이셨던 것이야, "


그 말을 듣고 난 후 외할머니의 빈자리가 한층 더 크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나는 이제 잘 넘어지지도 않고 살도 올랐다. 지금도 문득문득 포도가 먹고 싶어 진다.  

어릴 적 이른 새벽 외할머니가 먹여주던 그 포도 한 송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