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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 미정 Mar 18. 2024

시간은 잘도 간다

하루종일 틀어져있는 텔레비전에 유퀴즈 재방송이 나왔다.

산부인과 여 의사 분이 나와 본인이 몇 년 전에 유방암에 걸렸었다 했다. 아파보니 환자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제가 너무 바쁘니깐 좀 쉬라는 하느님의 계시였나 봐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큰 일을 겪게 되면 어쩜 모두 다 똑같이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분은 항암치료를 하면서도 본인의 일을 쉬지 않고 했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일이 없었으면 항암치료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의사도 별수 없구나. 그래 이 암이라는 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감기 같은 거야."

라고 나 스스로 위로한다.  건강해져서 유퀴즈까지 출연한 유방암 환우를 보니 용기도 생겼다. 


수술하고 오면 몸이 예전 같지 않을 것 같아 집안을 미리 대청소를 해둔다. 

시간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창고방을 치우기로 한다. 아이가 어릴 적 사용했던 장난감, 책 등을 정리한다. 치우면 공간이 생기고  결과가 눈에 보이니 오랜만에 보람도 느껴졌다. 

집안일은 하자고 마음먹으면 끝도 없이 많은 것 같다. 

그동안 미뤄뒀던 집안일이 꽤 많다. 철에 맞는 옷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늘 뒤죽박죽인 옷장.

손댄 김에 안 입는 옷들도 모두 꺼내고 가족별로 겨울옷들을 잘 접어 정리한다.  

수술하기 전까지 침대시트 갈아두기, 이불빨래하기. 화장실, 주방 청소하기.

열흘동안 집을 나가 있어야 하니 아이짐과 내 짐들도 싸놔야 한다. 내가 완료해야 할 미션들이다.

주부는 수술을 하러 가기 전에도 할 일이 참 많다.


병원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며칠 전부터 준비해 뒀다. 

빼먹을까 싶어 종이에 리스트를 적어 준비완료 된 물건에는 밑줄을 쳤다.

열이라도 나서 수술을 미뤄지면 안 되기 때문에 온 가족 모두 감기 걸리지 않기 위해 외출도 줄이고 외출 시에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는데 마음의 준비는 왜 이렇게 안되는지 모르겠다.


친정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서 가족들의 안녕을 바라는 기도를 20년이다 했다.

며칠 전 엄마가 염주를 하나 주셨다. 

"이거 엄마가 기도할 때마다 돌리는 거야. 밤에 잠 안 올 때마다 관세음보살 찾으면서 돌려봐 그러면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면서 잠 잘 올 거야."라고 했다. 

집에서의 마지막밤. 잠이 오지 않는다. 

엄마가 줬던 염주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돌려본다. 마음이 약해지니 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게 되었다. 

무섭고 두렵지만, 내일이 되면 내일의 용감한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해낼 수 있다고 되뇐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새날이 밝았다. 

아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 맞춰 학원을 하고 신랑과 나는 마지막 집과 짐을 정리한다. 

점심은 엄마네 집에서 먹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입맛이 없어 먹기 싫었지만 엄마가 조금이라도 안 먹고 가면 안 된다고 걱정해서 억지로 삼켰다. 이제 진짜 병원으로 가야 한다. 

아버지는 가윤이는 걱정하지 말고 네 몸이나 잘하고 오라면 포옹해 주셨다.

엄마는 수면바지 차림으로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한가득이다. 

"아기 낳으러 가는 거면 얼마나 좋아. 아휴, 잘될 거야. 잘하고 와." 하며 안아주셨다.

"엄마 가윤이 앞에서 많이 울지 마, 부탁해. 도착해서 전화할게."

엄마는 내가 걱정되고 나는 우리 딸을 걱정한다. 

나도, 엄마도 목이 메어 어쩔 줄 몰라하며 헤어졌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간은 참 잘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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