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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 미정 Apr 25. 2024

멋쟁이 우리 아빠

"네 옆에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어. 그러니깐 걱정 마."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라고 네 옆엔 우리가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르겠다. 

수술 후 입원하고 있을 때 엄마와의 통화 늘 오열로 끝나지만 아버지와의 통화는"걱정하지 마라. 네 몸만 신경 써라."라고 늘 담백하다. 엄마가 어쩔 줄 몰라하며 우는 것과는 다른 온도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카센터를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명절만 쉬고 주말도 쉬는 날이 없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다닌다거나 외식을 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 시대는 다들 그랬던 것처럼 아빠와 여가를 보내는 시간은 적었다. 그래도 여름 내 생일이 있는 휴가철에는 가게 문을 닫고 계곡도 가고 바닷가도 갔었다.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부단히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보통 병원은 엄마와 함께 갔었는데 이때 엄마가 여행을 가면서 집을 비우게 된 것 같다. (아마도 초등 저학년 때인 것 같다. ) 그래서 아빠와 함께 예방접종을 하러 갔다. 주사를 기다리면서 

"아빠. 나 너무 무서워."라고 했다. 아빠는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라는 거짓말 대신 "순식간에 따끔하는 거야. 하나도 무서워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순식간에 따끔'이 말이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이번 유방암 수술하는 게 너무 무섭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수술받았던 그 당시 심정을 이야기해 주셨다. "신장암이라고 했을때 나는 아무 걱정 없더라고, 차라리 암이어서 보험료나 타먹었으면 했지. 눈 하나 실명됐을 때도 장님도 있는데 눈 한 개로 사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나라고 생각했어. 그니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 "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12년 전쯤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다행인 건 초기인 것 같은데 수술을 해서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슬픔에 어쩔 줄 몰라하는데 당사자인 아버지만 덤덤하다. 수술을 하고 조직검사 결과 신장암 0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 다행히 항암치료가 필요없었고 현재는 재발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신다. 


칠순 잔치를 일주일 앞둔 날, 강원도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눈을 좀 다쳤어.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네. 당신 지금 좀 와줄 수 있어?"라는 전화였다. 엄마의 통화를 옆에서 들었던 나는 아버지 눈이 심각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하고 강원도로 철원으로 달려갔다. 그쪽에는 큰 병원이 없어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동해서 수술을 받았다. 시력이 돌아올지는 수술을 해봐야 안다고 했다. 아버지는 다쳤을 때 직감하셨다고 했다. 눈이 안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수술 후 결과는 실명이었다. 퇴원 후 혹시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어 안과 전문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했다. 하지만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 나만 오열하며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늘 덤덤하셨다. 칠순 잔치를 앞두고 이런 일이 생겨 친척들을 뷔페가 아닌 병원에서 인사를 드리게 됐다. 생일을 앞두고 이런 일 생겨 가족 모두 망연자실했었다. 한쪽눈으로 불편해서 어쩌나 매번 걱정스러웠지만 현재 아버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지 모르게 건강하게 생활하신다. 

이렇게 되기까지 본인의 노력도 있었지만, '나는 괜찮다.'라는 긍정적인 생각들이 많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입원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퇴원할 때 아빠가 뭐 도와줄 거 없어?"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 김서방이 알아서 잘하겠지. 아빠보다는 남편이 더 낫지." 하는 약간의 서운한 목소리에 "아빠는 나 외래 다닐 때 병원에 데려다줘."라고 부탁했다. "그래, 그건 아빠가 해줄 수 있지. "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외래가 자주 있어 편안하게 아버지 차 타고 다녔다. 진료를 받고 불편한 가슴으로 차에 올라타면 붙이고 눈감고 편안하게 쉬라고 하신다.

중고등학교 때 늘 아버지가 차로 등교 시켜주셨다. 고 3 하교할 때 늘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아버지는 느낌으로 내 마음을 알았던 것 같다. 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며 신나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 엄마가 잔소리라고 하려고 하면 "미정이 한테 성적으로 아무도 말하지 마. 얼마나 노력했는데. 됐어."라고 하시는 바람에 내가 더 크게 울어버린다. 

수능을 100일 앞둔 날 아버지는 또 한 번 가게 문을 닫는다. 내가 바라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르며 기도를 하러 떠났다. (아버지의 이러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나는 그 기도를 들어드리지 못했다.) 수능 보러 가는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시험장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때도 "잘 보고 와." 그 흔한 "파이팅!"이라는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떨려하고 있을 딸에게 장윤정의 '어머나'를 틀어줬었다. 

아마도 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아빠의 필살기였는지 모르겠다. 고생했다며 손을 잡아주거나 등을 쓸어주진 않으시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아프지 않았을 적에도 재활용 쓰레기며  음식물 쓰레기는 더럽다고 절대 못 만지게 하셨다. 아버지 눈에는 아직도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아빠 회사에서 10킬로 박스 번쩍번쩍 들어. 회사에서 음식물 쓰레기 맨날 보는데 뭐. 괜찮아."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하신다. 

엄마보다 먼저 강원도에 내려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몸은 좀 어때?" " 너무 괜찮아졌어. 이젠 진짜 괜찮아.""그래? 괜찮다니 너무 기분 좋다. 그래 너만 괜찮으면 다 되는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고맙다 고마워."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프고 난 후 아버지는 내 팔의 지킴이다. 내가 혹시라도 무서운 거 들까 싶어 먼저 나선다. 그런 아버지의 나이가 벌써 내일모레면 80살이다. 자식들에게 기댈 법도 한 나이인데 늘 인은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어른들이 나에게 구김살 없이 큰 것 같다고 말한다. 구김살 생기지 않게 그늘 없이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든든하게 계셔서 감사하다고. 어버이날 핑계로 꼭 안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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