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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 미정 Apr 24. 2024

삶을 바라보는 태도

아프고 나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삶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밤에 자기 전에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프기 전에는 몰랐다. 

매일 아침은 정신없었고 피곤했다. 자기 전에는 늘 내일이 두려웠다. 

영양사를 그렇게 오래 했으면서도 '물건을 제대로 발주했을까?'가 제일 스트레스였다. 욕심이 많아서 사업장 5군데를 동시에 관리하고 있었다. 한 군데라도 실수하면 실타래처러 엉켜버린다. 전날 발주서를 눈 빠져라 여러 번 확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8시 10분 전화벨이 울린다. 

"영양사님!!! 오늘 코다리무조림에 코다리 양이 너무 작아! 이걸로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며 여보세요가 끝남과 동시에 조리장님이 대뜸 소리를 지른다. 아 맞다! 오늘 손님이 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존과 같이 발주를 넣었다. 코다리 같은 경우는 밖에 나가 직구매할 수도 없다. 이럴 땐.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혹은 

"00 파출 사무소인데요. 오늘 보내드리기고 한 분이 일이 생겨서 못 보낼 것 같은데 어쩌죠.?"

어쩌라니? 어쩌라니. "대체 일을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약속하신 거잖아요. 그분 못 오면 소장님이라도 들어오세요!" 하며 악을 쓴다. 이럴 땐 내가 북 치고 장구치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주문주신 식빵이 배송오류로 인해 퀵으로 배달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배식 시간에 맞출 시 있을지는..." 맞춰야지 어떻게 해서든 와야지. "10시 30까지 무조건 들어와야 해요. 못 들어오면 완제품 샌드위로 보내주시던가요!" 하며 따진다. 이럴 때 보면 따지는 거에 일등이다. 


코로나 시절에는 가관도 아니었다. 5개 사업장들이 여사님들이 돌아가며 코로나에 걸리고 마는데... 특수한 시절이 아닐 때도 파출이 없는데 코로나 시절에는 더 없었다. 

"영양사님, 나 몸 안 좋다고 했잖아. 검사해 보니 코로나네...  내일부터 못 나갈 거 같은데..."

아픈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네, 몸조리 잘하세요."라고는 하지만 내 말투가 썩 좋진 않았을 것이다. 아는 인력을 총 동원해서 전화를 돌린다. 그리고 전화받는 여사님들에게 내일 나와달라고 애원한다. 

"여사님 한 번만요. 네? 제발 부탁드려요. 오죽하면 전화드렸겠어요. 알죠. 여사님 사정 제가 너무 알죠. 출퇴근 택시로 하세요. 택시비 드릴게요.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내일 뵐께요. "라고 이번에도 사람을 맞췄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내 짜증과 화가 모두 가족들에게로 간다. 특히 우리 신랑에게 많이 퍼부어 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신랑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 못났다.)

기존 조리장님이 오시지 못하는 사업장은 출근 시간보다 좀 빨리 가서 여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맞장구도 쳐드리고 어깨도 두들겨 드린다. 다음에도 또 부탁한다는 말도 전달한다. 이런 일들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다 보니 다음날 아침이 두려웠던 것 같다. 

게다가 강의한다고 준비할 적에는 더 잠이 안 왔다. 식재료가 부족하진 않을지, 혹은 빼놓고 가는 건 없는지. 차가 막혀서 지각하는 건 아닌지, 요리하다 아이들이 다치진 않을지, 약속된 시간 안에 수업을 잘할 수 있을지 등등 걱정되는 것이 많았다. 많이 확인하고 연습하는데도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영양사와 강사를 하지 않는 요즘에도 아침 전화벨이 울리면 두렵다.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도 다음날이 되는 게 무서웠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감사한 마음보다는 심란한 마음과 무기력한 마음이 들었다.  무기력한 마음이 짓누르고 있으니 누워만 있고 싶고 삶의 재미가 없었다. 사람들의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모두 본인이 암이 아니라 다행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라며 내 맘대로 다른 사람의 위로를 곡해했다. 의사들에게도 '환자들 수술만 해봤지 본인들이 암에 걸려보지도 않았잖아.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괜히 심통이 났다. '왜 나일까. 아프지 않았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온 걸까.' 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기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차라리 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만하길 천만 다행히라고 말이다.

내 가족이 아니고 내 지인들이 아니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한다. "초기는 괜찮아.""유방암은 주위에 많이들 걸리더라.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니더라.""차라리 유방암이라 얼마나 다행이니." 마음이 심란할 때는 이게 위로가 맞나 싶었다. 본인들이 초기 암이라고 해도 진짜 괜찮을까 싶었다.

어제 동네 아는 사람을 만났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워?" "저 이제 일 그만두고 놀고 있어요." "아니 왜? 그렇게 열심히 하더구먼." " 유방암 걸렸거든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러면  대화상대방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어쩔 줄 모르며  기본적인 위로의 말들이 줄줄 나온다. 이젠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맞다.면서 나는 정말 다행이고 이젠 괜찮다고 말이다. 

신랑이 요즘 왜 이렇게 자기한테 잘해주냐고 묻는다. 아이도 엄마 "왜 그래?"라고 묻는다. 다른 사람 말고 가족에게 더 신경 쓰고 잘해주고 싶다.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시간에 쫒게 사느라 뭐가 행복인지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발에 땀이 나게 액셀을 밟으면서 이게 행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잠깐의 틈이 있으면 공원 걷기 운동을 나갔다. 마찬가지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아이가 올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지금은 지나가다 보는 꽃들이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를 갖고 있는구나도 알게 되고 발에 땀나게 시간을 쫒지 않아도 된다. 그저 넉넉하게 보내도 된다. 암에 걸리고 불행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감사할 일들이 넘쳐난다.

불안한 내일이 또 올 수도 있지만 지금은 행복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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