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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선 최금희 Aug 14. 2022

개성 향토음식 -  장땡이

친정엄마가 들려준 이야기 1

개성 바게죽집

해방 전 외갓집은 너무 가난해서 늘 한 바게쯔(양동이의 북한말) 죽을 쒀먹어서 외갓집을 개성 바게죽집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엄마가 가장 싫어하던 음식은 '죽'이었다.


나의 엄마는 개성이 고향이다. (한국에 정착한 지 15년이 된 지금까지도 아직까지 엄마라는 표현이 낯선 나다. 고향에서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호칭을 부르며 자랐다. 엄마라고 하면 아기 때나 하는 반말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일가 식솔을 거느리고 일제 강점기 개성을 떠나 간도나 만주로 이주하려다가 함경도 청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일찍 사망하면서 나의 외할아버지는 조카들까지 거두어서 11명의 대 식솔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엄마의 조모님과 옹기종기 6남매와 사촌 형제들까지 아이만 8명, 그중에 외할아버지가 유일한 가장으로서 가정경제를 책임지다 보니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엄마는 그때 그 시절을 두고두고 회상하면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외우곤 하셨다.

우리 집과 외갓집은 청진 시내에서 서로 다른 구에 살아서 자주 오갔다. 어렸을 적부터 엄마는 고향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고 가난했던 해방 전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이 정상적으로 배급을 공급해주었지만, 늘 배급 날짜 전에 식량이 떨어지기가 일쑤여서 주민들은 식량 조절을 위해 시래기 밥이나 칼국수나 죽을 가끔씩 해 먹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지금이야 어쩌다 죽을 먹지만 해방 전후에 외갓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늘 죽을 먹었다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셨다. 오죽 가난했으면 '개성 바게죽집'으로 불렸겠냐고 하시며 현재의 작은 행복에 안도해하는 엄마의 모습은 늘 밝으셨고 희망적이셨다.


우리 집에서는 개성식 음식을 자주 먹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장떡(장땡이:개성 향토음식)과 보쌈김치다.


개성 장땡이(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개성 향토음식 - 장땡이


오늘은 먼저 '장땡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개성의 향토음식 장땡이라고 한다. 내 기억에는 대체로 봄과 여름 사이에 엄마가 해주었다. 된장에 쌀가루와 파를 넣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납작하게 구워주는데 짭조름하고 매콤해서 밥반찬에 제격이었다.


해마다 봄철이면 중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청소년들은 농촌 지원을 나간다. 학교나 직장마다 할당된 농장으로 가는데 우리 학교는 늘 기차 타고 머나먼 시골로 보름씩 농촌 지원을 가곤 했다.


내가 봄 농촌 지원을 갈 때 엄마는 배고프지 말라고 말린 국수를 기름에 튀긴 다음 부피도 줄이고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편하게 부수어서 넣어주고 장떡을 구워주곤 하셨다. 현지에서 힘든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숙소에서 나는 친구들과 엄마가 해주신 장떡과 국수 튀김을 나누어먹기도 했다. 장떡이 짭짤해서 쉽게 상하지 않아서 해주신 엄마의 사랑이었다.


한국에 와서 첫 해 어느 날 엄마의 장떡이 너무 그리워서 한 번 해보았다. 그런데 된장과 쌀가루의 비율을 몰라서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평소 나의 음식을 가장 좋아하는 남편이 웬일인지 그날만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거머스레한 장떡을 나 혼자 버리지 않고 눈물을 감추고 먹었다. 그때 남편의 행동은 지금도 야속하고 괘씸한 생각이 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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