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초가집

제주 전통가옥

by 은정


나는 제주 토박이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 제주

그 중에서도 동쪽 끝 중산간 마을이 내 고향이다.


요즘 들어서야 다른 지역 사람들도 내려와 살면서 카페니 펜션이니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집과 집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해안가의 마을과는 달리,

집들 사이로 과수원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어릴 때의 우리 집에는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초가지붕과

굴묵(제주 전통 온돌시스템)통시(제주 전통 재래식화장실)도 있었다.

우리 집 뒤쪽으로는 미깡낭(귤나무)들이 가득한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일부공간을 우영팟(텃밭)으로 썼다. 돌담이 차곡차곡 쌓인 집둘레 한 귀퉁이에는

대낭밭(대나무숲)동백낭(동백나무)들이 든든하게 바람을 막아주었다.

대낭밭 바로 앞에는 통시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이 아주 무서웠다.

키 큰 대나무들이 어둑하게 늘어서 항상 그늘이 져 있었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그 큰 대나무들이 휘청이며 덤벼들 듯했다.

상상만으로도 을씨년스러운 돌계단을 큰 맘먹고 용기를 내어 올라가 엉덩이를 까 앉을라치면,

세상에 킁킁킁킁 돼지가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매번 바짝 노래서(놀라서)

돼지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우리 집이 초가집에서

슬레이트집으로 바뀐 게 내가 유치원도 가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그때가 대 여섯 살쯤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그 시절 코풀래기 똥강아지는 통시에서 생리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는 못했고

그 후 나는 바깥 화장실을 보고 나면 항상 죽을힘을 다해 방으로 뛰어들어 오곤 했다.


제주의 초가집. 성읍 민속마을


마을 구석에 자리한 우리 집은 일자형 초가집이었다.

툇마루 위 아마두문(툇마루와 삼방을 잇는 문)을 열면 가운데 삼방이라고 부르는 나무 마루가 있었다.

삼방 뒤쪽 그러니까 집의 정면과 마주 보는 방향에는 안팃문이라고 밖으로 연결된 합짝문이 나 있었는데

양쪽 문을 다 열면 저 멀리 낑깡낭(금귤나무)이랑 팔삭낭(하귤나무)이 보이면서

집을 관통하는 바람이 슝슝 드나들었다.


삼방 양 옆으로는 방이 나 있었다. 신발을 벗고 삼방에 들어오면 왼쪽에는 큰 구들방이,

오른쪽에는 앞뒤로 구분된 공간이 있었는데앞쪽은 작은 구들방으로,

뒤쪽은 정지(부엌)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이자, 동시에 작은 고팡(창고)쯤으로 활용되었다.

정지부엌은 컴컴했고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다.

엄마가 곤로에 동태찌개를 끓이는 것을 쪼그려 앉아 구경하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정지를 나와

마당을 지나 큰방 문을 열고 들어 가면 가장 먼저 붉은색 꽃담요가 눈에 들어온다. 꼬맹이들은 얌전히 앉아 담요를 덮고 놀면 될 일이지만, 굳이 이불 밑 하고도, 담요 밑 하고도, 요 밑으로 쏙 들어가 몸을 집어넣는 것을 좋아했다. 깔아놓은 이불이 헝클어진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따뜻한 요 밑으로 파고 들어가 이불을 잔뜩 덮어놓고 쏙 빠져나오면 내 몸이 있던 공간이 동그랗게 뚫렸는데 그걸 땅굴이라 이름 붙이곤 맨바닥을 강아지(강아지)처럼 뒹굴거렸다.

두 뺨에, 팔뚝에, 맨다리에 뜨끈하게 와닿는 열기와 기분 좋은 탄내가 아롱거린다.

지글지글 끓었던 지난밤의 시간을 장판 바닥에 그어진 그믓(흔적, 탄 자국)이 일러주었다.


굴묵과 굴묵근대. 난방을 위한 별도의 공간


큰 구들방 바닥을 뜨겁게 달궈주는 역할을 한 게 바로 굴묵이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제주식 온돌이다.


굴묵이 육지의 온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궁이가 부엌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 있다는 점이다.

'굴묵'하면 연기와 타는 냄새가 떠오른다. 엄마는 굴묵 가득 마른 말똥과 나뭇가지들을 채운 뒤

굴묵 근대로 밀어 넣고 솔잎과 지푸라기에 불을 확 지펴서 불을 땠다. 이렇게 불을 때는 것을 '굴묵 짇는다'고 한다.

굴묵에 들어가면 엄마 옆에서 나뭇가지나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열심히 주워 나르다가 벌테짓 (개구쟁이 장난)을 일삼았다. 엄마가 굴묵을 짇을때면 얼굴에 새까맣게 검댕이를 묻힌 채 연기에 콜록대면서도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불을 구경했다.

어떤 날은 가슴을 콩닥대며 불 꺼진 굴묵에 가서 재나 숯가루를 만지며 놀기도 했었다.

굴묵은 불을 때는 곳이라 어른들 허락 없이는 감히 들어갈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집은 마을 가장자리로, 내 또래 아이들 집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사방이 미깡밭 천지였다. 그래서 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로 동생하고 놀았는데

우리가 가장 자주 한 놀이는 뭐니 뭐니 해도 소꿉놀이였다.

집으로 들어오는 올레길은 아직 흙길이었다. 구석에 우리의 본부를 만들었다.

올레길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 중 적당한 돌덩이 몇 개를 주워와 밥상을 만들었다.

땅바닥을 박박 긁어 흙더미를 모아두고 수돗가에서 퍼온 물을 뿌린 후 살짝 끈적해진 흙덩이를

손 바닥에 동그랗게 굴려 밥도 만들었다. 길 옆에 돋아난 검질(잡초)들은 반찬이 되었다.

미깡낭 섭(귤나무 이파리)을 그릇삼아 올려서 냠냠 맛있게도 먹었다.

소꿉놀이를 하다가 그것도 심심해지면 장애물달리기도 했다. 코스는 집 둘레가 되겠다.

굴묵 안 나무 의자를 찍고, 집 뒤편 돌 트멍(틈)에 나있는 새오리(부추)들을 지나, 팔삭낭을 두바뀌 돌고,

수돗가 옆 장독대를 건들고, 동박낭 열매를 찾아 주워 돌아오면 되는 식이었다.

역시 동박낭 옆 휘청이는 대나무 숲은 무서웠지만, 놀다 보면 다 잊어버리고 그곳도 놀이터가 되었다.

어쩌다 가끔 우리 또래의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좀 더 들떠서 내 눈에 제일 예뻐 보이는 하얀색 긴 양말에 빨란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더 신나게 뛰어다녔다.


매서운 바람이 섬을 둘러싸 구석으로 몰아놓고 난타하는 것만 같은 제주의 겨울에도

유심히 살펴보면 알록달록한 것들이 꼬물락거린다. 그 기특한 생명력들 중 하나가 바로 동백꽃이다.


우리 집에도 동백낭이 있었듯 동백낭은 마을 곳곳에서, 어느 누군가의 집 뒤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언뜻 보기에도 줄기나 몸통이 딴딴하고 이파리도 두껍고 반짝반짝 윤기나는 게 제법 강단 있어 보인다.

동백나무는 다른 나무들 다 쉬는 겨울에 꽃을 피워냈다.

짙은 초록색 이파리와 동백낭 뒤에 둘러싼 까만 돌담이 꽃을 더욱 빨갛고 돋보이게 해줬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주는 관광과 휴양의 섬이라지만, 정작 그 시절 제주 도민에게

단지 관상용으로 뭔가를 심어놓는 일은 제법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10월의 동백나무. 겨울이 되면 붉은꽃을 피워낸다.



눈 쌓인 겨울 동백꽃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꽃을 피워 냈을 때 보다 동백나무가 더 쓸모 있었던 때는 열매가 익어갈 무렵이다.


단단한 나무는 열매도 어미를 닮아 단단했는데, 그 옹골찬 열매가 잘 익어

마치 세 갈래의 꽃잎처럼 벌어지면 옹크리고 있던 공깃돌같은 갈색 씨앗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씨앗은 햇볕 에 바싹 말려 기름을 짰다.

동백 열매를 줍는 일은 역시 왕할머니의 일거리였다. 나는 증조할머니를 왕할머니라 불렀다.

왕할머니는 나이가 매우 많아 더 이상 밭일을 할 수 없었는데 고급인력인 할머니나 엄마나 아빠나

그 외 다른 어른들은 동백 매를 줍는 시시한 일 따위로 노동력을 낭비할 수 없었고, 대신 왕할머니가

마실 다닐 겸 온 동네를 지팡이 짚고 봉다리를 들고 다니며 동백나무 열매를 주워 모았다.

이렇게 모아진 열매를 기름집(방앗간)에서 한방울도 남김없이 귀하게 기름으로 짜 내서, 커다란 유리 소주병에 담아 찬장 한 구석에 놓아둔다. 어쩌다 기침이라도 하 게 되면 엄마는 찬장 속 동백기름을 한 숟갈을 퍼서 속이 니글거릴거리지 않게 물 조금과 소금 한 꼬집을 함께 넣어 막 휘젓고는 먹으라고 건네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냄새도 안 맡으려고 코도 꽉 막고, 억지로 삼켜 넘겼다. 기침을 할 때마다 먹어야만 했던 그 신묘한 약은 나에게 아주 곤란한 숙제였던지라 먹어치우는데 급급해서 그 후 정말로 기침이 멎었는지 안멎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 시절 꼬맹이는 그저 얼른 먹고 뛰어나가서 놀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