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려운 과제
제주도는 까마득한 옛날, 뜨거운 용암이 흘렀던 돌덩이 섬이다. 사방에서 태풍이 사정없이 몰아쳐 거센 바람에 씨앗이 흩날렸고, 비가 그렇게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못하고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통에 헐벗은 건천만이 야속하게 자리를 지켰다. 쌀은커녕 밭농사도 쉽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생명은 참으로 질긴 것이어서, 돌덩이 땅이면 돌 틈에서도 뿌리를 내리면 됐고 바람이 몰아치면 바람을 타고 휘어진 채 자라면 그만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제주 중산간, 작아도 너무 작은 마을이다. 누가 뭘 하는지 뻔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밭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하면서 먹고살았다. 농사일이 바쁠 때에는 수눌음(품앗이)으로 서로의 일손문제를 해결했고, 소를 방목할 계 절이 오면 동아리를 만들어 돌아가면서 오름에 올랐다. 어느 집이고 큰일(결혼, 장 례 등 큰 규모의 경조사)이라도 생기면 결코 모른 척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다. 우리 집의 건너 집, 윗집, 윗 집의 옆집에는 괸당(제주 친인척들을 일컫는 말. 좀 더 진한 혈족 공동체)이 살았다. 마을 안팎으로 괸당들이며, 동네 삼춘들이며, 초가지붕이 불려나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가로 세로로 짜놓은 새끼줄마냥 단단하게도 엮여 살아왔다. 사람들 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놈 웃나”
그 시절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하며 나를 단도리했다. 놈(남)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소리다. ‘놈 웃나’는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놈’은 ‘나’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말일뿐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의미했다. 내가 아닌 ‘놈’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놈’들이 그렇게 매사를 정성 들여 따져보고 판단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누가 그랬다더라.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더라. 검증도 되지 않은 카더라 통신이 떠돌기도 하고,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거나, 딱히 모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혹시 모를 불이익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별생각 없이 동의하기도 한다. ‘놈’들은 위대했으나, 한없이 가벼웠다.
‘놈’들은 내가 꾸벅 인사를 하면 착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큰소리로 짖는 개에 놀라 도망갈 때면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쫓아 주기도 했다. 복작이는 잔칫집 윷판에서 도, 정월 초하루 소원을 빌러 찾은 굿당에서도 쉽게 ‘놈’들을 볼 수 있었다. ‘놈’들 은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의 벗이기도 했고, 이웃에 사는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놈’들은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늘 주위에 있었다. ‘나’가 아니면 ‘놈’이다. 나도 누군가의 ‘놈’이다.
놈 웃나. 맹심 행 댕기라
가랑비에 옷 젖듯 쉬운 말에 길들여져 버렸다. 편안할 때야 더불어 사는 매너라 둥글게 여겼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억압이 되었다.
무의식 중에 나도 모르게 놈들을 지나치게 의식했나 보다. 팔다리가 묶인 듯 신체와 생각이 경직되어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잠시 머물려던 벽 안에서 그만 화석이 되어버렸다. 나오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는 손마저 놈들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얼마 전 나는 김포공항에서 지하철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짐을 들고 각자의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했다. 혼잡스러운 역 안, 인파 속에서 시선만 살짝 올리면 여기저기 보이는 표지판들이 이곳이 낯선 자들에게 소리 없이 행선지를 일러 준다. 꼭 얼굴을 맞대지 않고도 충분히 정보가 전달이 되는 대도시의 배려가 새삼스럽다.
마침 도착한 열차에서 다수의 무표정한 사람들이 쏟아졌다. 나를 모를 게 분명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편안함을 느꼈다. 앞으로 내민 한 발에 역 안에서 열차 안으로, 나는 이제 다른 곳에 있다. 열차는 달려갔고 방금 전 같은 공간에서 숨 쉬었던 역 안 사람들과는 멀어졌다.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또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마지막 칸까지 계속 건너갔다. 건너온 칸칸마다 수많은 타인들이 스쳐갔다. 타인. 너무도 완벽한 타인.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살피며 살아왔지만 스스럼없이 침범하기도 했다. 흔쾌히 따뜻한 손을 내밀기도 하지만 때론 누구보다 차갑기도 했다. 난 놈들을 사랑하지만 놈들이 어렵기도 하다.
놈 웃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