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대하는 자세
기온이 떨어지고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던데, 제주도 늦가을 날씨가 만만치 않다. 매서운 바람이 이제 “이 섬의 주인은 바로 나” 임을 선포하는 것처럼 여태 가냘프게 피어있는 가을꽃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도로에 핀 페츄니아 꽃잎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나 꽃이나 움츠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바람을 빼놓고 제주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라산이 아무리 섬 가운데 우뚝 서 있다 해도, 사방이 바다라 거친 해풍으로부터 산 아래 사는 생명들 바람막이가 되어 주기에 역부족이다. 씨앗은 눈치만 보며 흩날리고, 나무들은 서슬 퍼런 등쌀에 키도 못 크고 휘어졌다. 도무지 숨 쉴 틈을 안 준다.
하지만 바람을 이고 살다 보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천지를 집어삼킬 태풍 바람에 바닷속은 뒤집어지고 덕분에 새로운 산소가 공급이 된다. 엄청난 바람 한복판에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간다.
날아갈 듯한 초가지붕에는 가로세로 촘촘히 띠를 둘렀다. 제주 방언은 바람 속을 뚫느라 짧뚝하고 쨍하니 귀에 박혔다. 쌀을 못 키우면 밭농사를 지으면 그만이었고, 과수원 둘레에는 방풍림으로 쑥대낭을 심었다. 적응의 위대함이고, 극복의 신화다.
바람이란 것 앞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피부가 갈라지고 뼛속이 얼어 붙고 손발이 곱아가며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쳐 댔을까. 바람은 맞서서 싸울게 아니라 함께 타고 불어야 한다. 아무리 모질어도, 눈물이 질질 날 정도로 야속해도 이 망할 놈의 바람을 그저 데리고 사는 것이다.
다시 11월이다. 나의 바람이 매서워지기시작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체육관에서는 학예회가 열렸다. 시작 시간이 한참 지난 교문 앞,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 상황이 작년, 재작년보다 더 안 좋다. 그래도 그땐 아이들 공연은 그럭저럭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차마 2층 체육관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불 꺼진 교실에서 전시물을 보는 척 어슬렁 댔다. 온 몸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식은 땀이 줄창 흐른다. 또 시작이다. 적당히 아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이 더 힘들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엄마가 돼서 소중한 아이의 학예회 무대 하나 보지 못하고 무엇이 무서워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지. 그러고도 엄마의 자격이 있는지. 내 신체적인 증상은 과연 타당하기나 한 건지. 쉼 없이 자책의 눈물을 쏟아내며,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지만 굳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분명히 후회할 게 뻔한데도 이 압도적 공포에서 도망쳐야 하나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었다.
“ 어머니, 그림은 저쪽 교실에 있어요.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4학년 때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뒤에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며 어두운 전시실에 불을 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 선생님 제발 불을 켜지 말아요. 순간, 교실이 시리도록 밝아졌다. 선생님은 엉망인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눈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 제가 몸이 좀 그래서... 못 본 척해주세요.”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평평해지기까지 하루가 걸렸다. 헛웃음이 난다.
글쓰기 교실이니 도서관 모임이니 수많은 덧칠 속에서 이젠 제법 편안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올해도 나는 체육관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이의 공연을 끝까지 보지도, 어느 누구와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다.. 반복되는 고통 앞에서는 요령은 고사하고 한번 아파 본 기억에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극복의 신화는 무슨. 바람이 불면, 그냥 처절하게 날아가 버리는 거다.
오늘 내 앞의 바람은 응어리고 트라우마다. 손발이 묶인 채 몸부림쳐도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굴레다. 온몸을 떨면서 악을 써도 헛소리에 불과하고, 뜨거운 눈물도 마를 틈 없이 날아가 흩어졌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그냥 분다. 불다 보니까 불고, 불만하니까 부는 거다. 육지면 좋았겠지만 여기가 섬 인걸 어쩌겠는가. 섬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그건 섬이 아니다. 심기일전하고 등에 업고 지고 휘감고 살아가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버거우면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밟아대며 실컷 탓할 것이다. 어우 야속한 바람. 어우 지겨운 바람. 어우. 이맘때면 꼭 이렇게 지랄을 떠네. 이 더럽게 징그러운 바람.
아, 설운 애기(서러운 애기)의 11월의 바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