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11.

by 어떤 생각


예전에 원전 핵폐기장 반대 시위로

한참 동안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바다가 있다.


변산반도 아름다운 채석강과 격포를 지나

염전과 젓갈로 유명한 곰소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꾸불꾸불 따라가다 보면

박형진의 (모항 막걸릿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 이제)라는

소설에서도 등장하는 그곳.


초록색 등대 배경의 바다는 은쟁반처럼 잔잔하고

포구는 수묵화 마냥 고요한 해변 마을 모항이 나온다.


한여름 피서철의 부산함은 피하고

저녁 햇살 곱고 바다향기 그윽한 요즘이 더 좋은 곳.

세상살이가 타분하고 정에 굶주린

나 같은 도시인들의 휴식처로 아주 제격이다.


가끔 관광지 시설공사가 한창인지라

중장비 소리와 암반 발파 굉음이 조용한 마을을 뒤흔들어도

견공들은 동네 한가운데 정자나무 그늘에서 낮잠에 빠지고

민박집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않는 곳.


내게 무슨 역마살이 붙었는지 괜한 마음이 동(動)하면

가방에 크로키북 몇 권 챙겨 떠나는 여행길.


벌써 이십여 년 전, 내소사를 들렀다 우연히 찾아간 그곳에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바지락을 캐러 나가도

혼자 남아 과자봉지 몇 개 선반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구멍가게를 지키는 꼬부랑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가는귀까지 먹어 남의 말 듣기는 힘들어도

신세한탄부터 마을자랑에 손주 자랑까지 입에 침이 마를 새 없다가도

가끔 대처로 나간 자식들 때문인지 오래전 바다에 수장된 영감님 생각에선지

멀리 해변가를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던 할머니.


구멍가게가 딸린 안채는 할머니가 쓰고

뒷채에는 밀물처럼 들러 며칠씩 묵고 가는 객을 위한 방이 하나 있다.


낮 기온은 높아도 해 떨어지면 바닷바람에 스산해지는 계절인지라

할머니는 그 흔한 연탄보일러 하나 없이 군불 지피기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데

노인네라 새벽잠이 없다며 신새벽에 일어나 아궁이마다 불을 피운다.

안방으로 시작해 나그네의 추운 마음을 녹여줄 뒷방까지


불 때는 일이 여간 어설픈 데다 성가시긴 해도

허리도 성치 않은 어르신에게 송구스러워 내가 좀 군불을 때보려하면 할머니는 막무가내다.


군불 지피는 일은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 기술자이고 무엇보다 솔솔 하게 재미지단다.

어쩌다 할머니 몰래 군불을 붙이려다 들키는 날이면 벼락 천불 혼구멍을 낸다.

그러니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래야

장작 좀 패고 땔감을 아궁이 곁에 운반하는 일이 고작이다.

그러면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는 주로 아궁이 앞에서

구수한 변사(辯士)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데


곡창지대로 유명한 김제평야 만석꾼으로 살던 집안에서

열일곱 살에 이곳 모항으로 시집이라고 와서는

바다에서 뱃일하고 돌아오면 사나흘 팔랑대며 읍내 술집을 전전하셨다는

바람개비 영감님을 모시고 사셨던 아주 소싯적 애기부터


지방대학을 차석으로 입학한 손주 놈 자랑으로 시작해 수년전 몇 달 묵다간 어느 시인의 이야기와

문전옥답 죄다 거덜내고 야반도주했다는 바람난 동네 과수댁의 풍문까지

한이 담긴 신세타령과 레퍼토리는 거지반 비슷하여 여러 번 되풀이되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언제나 새롭고 진지하다.


애기 속에는 더러 원망이나 서운함이 섞여 있기는 해도

결말에 이르면 노상 해원(解寃)과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허허로운 바다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스케치 몇 장 설렁설렁 그리다 돌아오면 할머니는 방이 춥지 않느냐며

내게 열 번도 더 묻고는 이내 해거름이 가까워지면

다시 아궁이에 군불 지피는 작업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한다.


어쩌다 너무 적은 양을 피워서 새벽녘에 일어나 이불을 찾는 날도 있지만

대게는 구들장이 쩔쩔 끓어 아랫목은 비워두고 윗목에서 자야 할 때가 더 많아

할머니께 조금만 때시라고 말씀드려도 당신은 자꾸자꾸 장작을 몰아넣는다.

알고 보면 그건 땔감이 아니라 당신의 정 그 자체인 것을


계절이 바뀌어 바람결이 달라졌음을 느낄 때나 도시생활이 퍽퍽해질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내 마음에 군불을 지펴주는 할머니

아마 세상살이 아쉬움과 애달픔과 원망들을

불길 속에 사르는 것이리라.


자식 손주와 소중한 인연들의 애꿎은 일도 몽땅 태워달라는 액막이의 소망도 곁들여서

군불 지피기로 하루를 시작하던 인정이 쩔쩔 끓어 넘치던 할머니와

지금쯤 해변가 언덕 위에 개망초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피어 있을

아름다운 모항을 그려보며


처서(處暑)를 며칠 앞두고 생각나는 당신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입니다.






그곳_모항 420mmX135mm, Watercolor on Paper(Croquis Book),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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