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의 길 찾기?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13.

by 어떤 생각



몇 년 전, 일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보다 사람에게서 쌓여가는 고약한 상처가 두렵다며

청춘을 바쳤던 본업을 버리고 뒤늦게 학교로 떠난 동료이자 친구의 간청(?)으로

오랜만에 교단에 섰는데


크리에이티브의 길 찾기?


밑도 끝도 없는 주제로 특강은 시작되었고

그나마 준비해 간 밑천이 거의 떨어져 갈 때쯤 '그리움'을 제품으로 생각하고 카피 한 줄씩 써보라고 젊은 녀석들 뒤통수가 찌릿해질 과제를 던져놓곤 슬그머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흠, 그립다는 거 그래 몇 놈이나 제대로 된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슬며시 속으로 웃음이 고이는데 한 시간을 넘게 떠들다 보니 목도 따갑고 머리까지 아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강의실 뒤편을 돌아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햇살이 눈부시고 따뜻하다.

운동장에선 벌써 웃통을 벗고 학생들이 공을 찬다. 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은 눈처럼 새하얗고

몸통이 부러진 등나무 옆구리에서는 연두색도 초록색도 아닌 새순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무벤치 아래 투구풍뎅이 등껍질이 반짝이며 흔들린다. 모진 겨울을 참아내고도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어찌 흑갈색 빈 껍질로 남아 저리 개미떼에게 끌려가고 있을까? 아무리 미물이지만 전생에 지은 죄가 얼마나 많았으면


숲길 옆에는 계곡물이 급하게 비탈을 달린다.

도시의 소음도 집어삼키고 햇살마저 빨아들일 듯, 날을 시퍼렇게 세우며 급하게 커다란 호수 쪽으로 향하는데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물길처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내달리는 내 인생길의 끝은 어디쯤일까?


쓱싹쓱싹 와이퍼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비바람을 뚫고 달려온 길,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직선으로 이어지다 곡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곁으로도 닿았던 아찔했던 기억들 아, 그래었지


어느 땐 목적지도 모른 채 그냥 세월에 얹혀 지나온 흔적과 예감은 늘 희망적이지만 무너지는 때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저 흐르는 물처럼..


뭐 하니?

흰색 와이셔츠에 곤색 바지 그리고 비닐 슬리퍼

벌써 샌님 분위기가 나는 친구다.


아, 그냥 생각 좀 하느라고

그래 애들이 뭔가 열심히들 쓰는 거 같던데?

응 내 말은 별 재미없어하는 거 같아서..


두고 온 일 생각하냐?

그런 셈이지 머

계속 광고질 하고 살 거고?

아직은 그래야지, 달리 먹고 살 재주도 없고..


.....


엉뚱한 놈들, 이게 '그리움'을 표현한 카피란다.


A. 시냅스에 새겨진 자극의 흔적? (어렵다, 자넨 의예과가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B. 그리움은 삶을 거역하는 유일한 형식. (흠 괜찮은 걸, 그런데 넌 철학과를 갈 걸 그랬다)


C. 너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의 강이다. (자식 너는, 국문과를 지망했어야 했는데..)


D. 잠든 시간의 귓속말. (좋은데, 그래도 신방과보단 미대가 더 어울렸겠다)



창가에 부서지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상상도 상징도 아닌 주옥같은 언어의 공백을 감정하느라 순간 이곳이 학교도, 수업도, 혼자서도, 낯섦도, 더더욱 투잡도 아닌 어떤 목적도 잊은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강의실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엉뚱하지만 기발한 생각들은 마치 투명한 유리관 속에서 뜸 들여 발효된 언어들이 창살에 먼지처럼 곱게 내려앉아 켜를 더해가는 햇빛의 나이테 같은 투명한 꼬리를 달고 순수하게 한없이 쏟아질 뿐


젊다는 것, 그래 그것 만으로도 좋다

그냥 태풍을 좇는 소솔바람 같은 생각들이지만 진지하게 듣고 묻는 옆모습만 우러러도 이렇게 숨 막히도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세상의 위대한 크리에이티브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곳_선유도 망주봉 210mmX135mm, Watercolor on Paper(Croquis Book),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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