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에는 신사동에 가야 한다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18.
자기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시인도 있지만
바람이 불어 마음 동(動)하는 그런 날에는
나도 지하철을 타고 신사역으로 간다.
8번 출구로 나와 도산대로 횡단 보도를 오르다
외국계 광고대행사가 있는 제이타워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그곳부터가 가로수길이다.
늦가을에는 노란색 은행나뭇 잎이 온통 도로를 덮는 이길은
밀레니엄 전까진 그냥 신사동사거리 뒤편 고즈넉한 동네였는데
그때가 2005년도 쯤인가?
잘가던 치킨집 말고는 그닥 볼거리도 없던 골목에
유명 영화사가 옮겨오고 '블름 앤 구떼' 같은 노천 카페들과
고급진 청담동 '하루에'가 길 가운데에 떡하니 생기면서
작은 공방들이 시나브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삼사오오 구경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지금은 스타일리시한 카페와 하이스트리트형 샵들로 넘쳐나는
그곳은 결코 자동차로 이동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라서
가끔 휴대폰만 달랑 들고 천천히 걷고 싶은 이 거리에는
고만고만한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우선 '블루스톤' 갤러리에 들러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 그림도
찬찬히 음미해보고 큰길을 벗어나 골목 안쪽에 숨어있는
작고 예쁘게 생긴 가게들을 순례하는데
그곳은 감성이 통하는 친구들과 찾아가는 단골집들이 많다
초입에서 3블록을 들어가 '모던'이라는 퓨전식 오뎅바에 가면
주인장 얼굴처럼 가격도 인심도 후하고
신사 파출소 뒤편으로 가면 지중해풍 감각이 돋보이는
'로프트'라는 와인바에서 즐기는 칠레산 하우스 와인 맛은
결코 비싼 와인 맛에 전혀 뒤지지 않고 삼삼하며
그리고 번화가 도심에 대나무 숲길이라니?
블랙 여우 조각상이 시크한 '카페 키츠네' 테라스 의자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길 나는 좋아한다.
유명 케이크집 듀자미 옆에는 '프레임'이라는 간판을 달고
천장이 온통 보랏빛 네온 조명으로 야릇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볼로내제 파스타가 맛있는 다이닝 바가 있고
창문이 넓고 채광이 좋아서 동남아 휴양지가 생각나는
이국적 분위기에 특히 쏨탐이 맛있는 태국 스타일 퓨전바
'감성 아시아'는 생각 밖으로 음식값이 착한 편이다.
세계 3개 매장 중 국내에 유일한 매장이자 수제맥주로도 유명한
'미켈러 바'는 맥주 맛도 좋지만 북유럽풍 세련된 나무의자와
러프하게 분필로 휘갈겨 쓴 메뉴판이 매우 인상적이며
큐티하면서도 클래식한 로고를 단 간판이 금방 눈에 띄는
‘디자인 포 도그’ 가게에 들러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을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은 즐겁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면 생각나는 가로수길,
어쩌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좋고
혼자서라도 볕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잔을 홀짝이다
아쉽지만 벌써 올드팝이 되어버린 영국 록밴드 '폴리스'가 부르고
스팅이 작곡해 더 유명해진 Every Breath You Take라는 노래가
운좋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그곳이 번다한 도심 한복판 임에도
인적 하나 없는 들판에서 오랫동안 달려온 갈바람 한 줌이
내 가슴에 들어와 조용히 머문다.
가을 들판 210mmX135mm, Watercolor on Paper(Croquis Book),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