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학 또는

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

by 해피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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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

---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의 제 2시집


코발트빛 시집 한 권 꺼내든다. 장식도 없이 다만 파아란 물 머금은 표지. 만감이 교차한다. 이 색깔을 하늘이라 해야 하나 혹은 바다라고 해야 하나. 어느 편에 빗대어도 무방할 싱그러움. “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라는 표제가 흥미롭다. 하늘이 바다를 만났으니 하늘과 바다는 각자의 몸을 벗고 서로에게 스민다. 하늘이되 바다이며 바다이되 하늘인 그 하늘바다에 몇 사람 옹기종기 채송화 씨를 뿌리고 있다. 어린 날 뜨건 화단에 피어 있던 작은 꽃들. 우리 마음 속 변치 않는 채송화 색깔이 추억의 양분을 달게 빨아왔듯, 꽃 품은 채송화 동인의 씨앗은 하늘바다에 뿌리내려 나지막한 개화를 꿈꿀 것이다. 그것들을 야금야금 음미하는 새콤달콤한 맛, 나무 그늘 밑 평상에서 나누고 싶은 맛이다.


1. 맑은 물에 드리다


하늘바다에 뿌려진 채송화 씨앗들은 무엇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나는가. 하늘바다는 어떻게 기름진 옥토가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단순하게 시작된 의문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소급된다. 좋은 시가 태어날 수 있도록 흙을 고르고 매만진 자리에 씨앗을 꼭꼭 눌러놓는 마음씀. 시인은 스스로 씨앗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가슴으로 품어 씨눈을 틔우고, 육즙을 내어 그 양분으로 기꺼이 바치는 일. 그러므로 그가 오래 품어 내놓은 씨앗은 바로 시인 자신을 닮는다.


세수를 했는데

잊고

또 세수물을 받았다

물을 내리며

두 손을 깍지 낀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 나기철 「맑은 물」전문


다시,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일군의 시들이 있다. 때로는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때로는 독자를 상해하기도 한다. 자극적인 문명이 범람하는 환경 속에서 그러한 사디즘적인 징후는 이미 일상적인 일로 치부된 지 오래다.

그러나 나기철 시인은, 시란 독자를 혼란케 하거나 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위무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굳이 교시적일 필요도 없고, 쾌락적 감흥을 좇을 필요도 없다. 그저 고요한 오지랖으로 사물을 품어 틔워내는 일. 그러기에 그 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물들은 착한 눈으로 독자를 마주본다. 물빛 가득한 그 눈은 바로 세숫물에 비춰진 시인의 눈이기도 하다. 세수를 했는데 잊고 또 세숫물을 받아 버리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낮은 마음. 자연의 어느 작은 귀퉁이조차도 허투루 보아 넘기거나 남용할 수 없다는 것, 이 자연스러운 발로가 시인의 마음이고 시인다움이라고 말한다면 억지일 것인가.

위의 선문답 같은 시를 통해 우리는 ‘맑은 물’의 의미를 응시하게 된다. 시인이 넉넉히 가슴을 풀어 스스로 하늘바다가 된다. 그 맑은 물에 작은 ‘詩앗’ 드리운다.


2. 착하다, 굴삭기


산허리나 부러뜨리고 두 눈 부라리며 오갈 데 없는 오두막이나 헐어내던 피도 눈물도 없던 굴삭기가 오늘은 웬일로 켜켜로 쌓인 아스팔트를 열어젖히고 있었다. 끈덕지게 뻗대는 아스팔트를 착착 걷어내고 있었다.

알통 툭툭 불거진 그 팔뚝이 눈이 부셨다.

--- 윤효 「착하다, 굴삭기」전문


사물을 굴절시켜 바라보는 시선은 시인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특장 중 하나이다. 시대와 사회를 비틀어 왜곡할 수도 있고, 대상과 정서를 변화시켜 오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과 오역의 지점으로부터 그 자신만의 새로운 독해가 이루어진다. 늘 그 자리에 있었으되 무심히 지나쳐온 것들에 대한 반성, 무심히 지나쳐왔음을 미안해하며 무릎 끓어 그것들을 포용하는 마음, 이 어진 마음씀이 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창조는 조물주의 창조와 유사하되, 그것보다는 훨씬 경제적이고 합리적이다. 애초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었으되 인식의 대상이 아니던 것을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시인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여기, 굴삭기가 있다. 시인은 이것을 일러 ‘착하다’고 얘기한다. 당최, 굴삭기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착하다’는 형용사는 가당키나 한 수식어였던가. 이 부적절한 어울림에 대해서 시인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까.

시인에게 있어서 산허리를 부러뜨리고 오두막이나 헐어내는 굴삭기란 사전적인 의미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비존재이며 시인의 인식 너머에 있다. 있으되 없던 것, 그 비존재는 ‘착하다’는 수식어를 만나 비로소 존재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바라본 굴삭기는 “끈덕지게 뻗대는 아스팔트를 착착 걷어내고” 있다. 산을 깎고 집을 부수는 것이 일반적인 굴삭기의 모습이라면, 아스팔트를 걷어내는 역할은 상식 너머의 새로움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일견, 그 모습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해 보인다. 그러나 전자의 행위가 자연을 해치거나 가난한 거처를 짓밟는다는 점에서 파괴와 흉포함의 정서를 띤다면, 후자의 행위는 자연 위에 덧씌워진 문명의 흔적을 거둬낸다는 점에서 생태적인 복원의 의미를 갖는다.

즉, 시인이 찾아낸 굴삭기의 새로움은 ‘살려냄’의 정서에 닿아 있는 것이다. 파괴적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굴삭기가 본래의 역할을 버리고 생태 복원의 이미지로 다가올 때, 시인은 나직히 그를 불러 ‘착하다’고 어루만진다. 이러한 굴삭기의 반전은 문명 속에서 시인이 찾아낸 하나의 가능성이다. 슬쩍, 그의 말줄임표가 속내를 내비친다. 굴삭기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임에야…


3. 소처럼 웃다


시가 시의 명찰을 붙이고 걸어올 때 그 시는 식상하다. 시가 아닌 무엇으로 허술하게 걸어와 시처럼 꽉 깨물어줄 순 없을까? 쇼윈도우 마네킨의 화려한 옷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은 것과는 달리, 우리는 때로 장롱 속 꽃무늬 옥양목 치마에서 더할나위 없는 미적 감동에 젖어들기도 한다. 꽃무늬 치마는 촌스러우나 꽃무늬는 아름답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옥양목 꽃무늬 치마를 꺼내입는 것은 촌스러우나, 꽃무늬를 찾는 마음은 아름다움이다. 꽃무늬는 예나 지금이나 지극한 미의 대표적 표현 형태인 것이다.

이런 시가 있다. 시도 아닌 듯, 툴툴툴 털어놓는 이야기가 시의 전부이다. 영락없이 마실가며 나누는 담소 같다.


중학교 일학년 일학기 때였다. 하교길에 아래냇가 방천둑에서 소를 뜯기고 있던 아버지를 만났다. 다가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올렸더니 진짜 소처럼 웃었다.

--- 이시영 「소처럼 웃다」전문


소처럼 웃는다는 것은, 먼저 소와 교감한다는 의미이다. 교감을 통해 소의 감정을 헤아리고 느껴야만 그 웃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읽혀진 소는 스스럼없이 웃어 보이기도 하는가. 지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개방된 소의 웃음은 귀할 수밖에 없다.

채송화 동인들이 가려 뽑은 위의 시에서 우리는 시가 아닌 시를 보게 된다. 스스로 시라고 내세우지 않지만 온몸으로 시가 되어 있는 시. 옥양목 치마에 그려진 꽃무늬처럼 그 속에 담겨진 정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비록 퇴색했을지언정 ‘꽃’이라는 본래면목을 놓치지 않고 담보로 하는 시, 이 꽃을 보며 헤살스런 웃음을 짓지 않을 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이러한 웃음이 궁극적으로는 소의 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억지로 장식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찾아가는 행로.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구도자의 모습처럼 단단하고 평화롭다. 그 길 위에 던져진 말씀이 가슴을 친다


착하게 살았던가 보다

그 무덤

제비꽃 몇 포기 곱다

--- 복효근 「제비꽃 碑銘」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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