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지난 겨울 설렁설렁 썼던 글이다.
혹시 '죽음'의 고찰이 아니냐는 오해를 거르기 위해 명료한 표제로 대체한 뒤
설렁설렁 시읽기 형식의 하나쯤으로 남겨놓는다.
<다층> 2020 겨울, 통권 88호
도로 위에 시집이 놓여 있다. 거대한 바퀴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쳐간다. 이 왁자한 퍼포먼스 속에서 분별되지 않는 나의 좌표는 나를 절망하게 한다. 나는 풍경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주체인가 객체인가 아니면 구경꾼인가? 마침내 나는 도로에 선 나의 실루엣이 죽은 시집에 중첩되는 것을 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의 죽음’은 꽤 오래 된 화두이기도 하다. 시의 죽음이라는 선언 앞에서 우리는 그 문구 속에 압축된 함의를 먼저 찾아야 한다. 일견 이때의 죽음은 시의 부재라는 표피적 해석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그건 여러 단층의 복합적 의미를 동시에 포괄하는 것이다. 이 복잡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죽음의 주체’를 명확히 추출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죽은 시집과 죽은 시집에 중첩된 실루엣은 낡은 이름표처럼 침묵한 채 차례로 소명되기를 기다린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죽음의 첫 번째 주체는 시집(시)이다. 이 죽음은 시집에 깃든 페르소나(시인)의 죽음과 ‘나’(독자)의 죽음이라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죽음을 함께 목격하였으므로 그것을 공유하는 밀접한 관계다(‘밀접’이란 반드시 ‘친밀’의 의미를 띠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피할 수 있었던 그 상황을 직면한 주체들이기도 하다. 사실, 단숨에 시집을 깔아뭉개는 커다란 바퀴를 피할 수만 있다면 죽음의 연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로 한 복판에 놓인 시집을 다시 톺아볼 필요가 있다.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 위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는 시집, 이러한 현장은 그 자체로서 죽음의 징후가 된다.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 속에 벌어지는 죽음이란 어디까지나 우발적 사건이지만, 그곳에 방치되었다는 점에서는 미필적 고의의 결과로 여겨질 공산이 충분하다. 하지만, 벌어진 죽음 어디에서도 그것에 이르는 핍진성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밝혀지지 않은 죽음의 핍진성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은 그 죽음을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이고,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소명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에이브럼즈(M.H. Abrams)의 말을 빌린다면, 시의 죽음은 세상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죽음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동력을 승화시켜 빛나게 삶을 되비추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 시와 시집이 있다. 이들이 비추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과 함께 끊임없이 당도하는 죽음의 의미가 그러하듯이.
이 이야기는 어떨까?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유고 시집을 남기고 너무 일찍 떠나버린 시인. ‘죽음의 몇 가지 단상’은 김희준(1994.9.10∼2020.7.24)에게서 비롯되었다. 칩거에는 소통이 제한된다. 그러기에 우연히 흘러든 부고는 선잠 같은 환영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녀는 ‘나’를 거쳐 ‘우리’와 ‘시’를 죽음의 단상으로 이끌고 있다.
죽음이란 인간의 역사 이래 가장 신비롭고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무릇, 해결되지 않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죽음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인간에게 깊이 파고들어 생존의 뜨거운 동력이 되어주지만, 그 스스로 해결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미끄러진다. 애초에 부여된 미해결의 숙명은 어쩌면 죽음의 의미와 신비성을 보장해주는 장치일지 모른다.
김희준의 시는 수다스럽다. 수다스러워서 부담스러울 법하지만 단어 하나 흩어지지 않고 독자의 가슴에 꼭꼭 담긴다.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중략… /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부분)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반인족’이라 선언한다. 그녀는 안데르센의 공간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조숙한 소녀 화자는 “동화가 백지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또한,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는 오빠의 방식을 무서워한다. 화자의 머리칼을 넘겨주는 오빠의 ‘혀’는 “구름을 오독”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오빠의 혀는 말한다. “인어는 풍성한 머리칼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그는 인어의 상반신이 아가미를 가진 물고기라고 믿고 있다. 이 믿음으로 인해 화자의 세계는 파괴되고 제어된다. 이것이 화자가 오빠에게서 느끼는 ‘무서움’의 정체다. 스스로 반인족이라 고백했던 소녀의 상반신은 구름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제어했던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운명’을 벗어던지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대단원을 미리 알고 읽는 스토리처럼 문득문득 그녀의 시는 명료하게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이 명료함은 오독을 전제로 한다. “너의 숲에서 중얼거렸어” 그녀가 속삭인다. 그 중얼거림은 끝나지 않았다고.
김효선의 시는 참 징그러운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 같았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랑. 이 사랑은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을 통해 절묘하게 변주된다. 어쩌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를 사랑, 그런 사랑이 있다면 서슴없이 뛰어들라 말하는 목소리가 처연한 악기 음색에 묻어 있는 것 같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긴 기다림 끝에 더 긴 기다림이 있을 거라는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달은 사라진다/… 중략…/ 이별할 때 버드나무를 꺾어 주었다는/ 옛사람의 눈빛으로 소금을 켠다/ 내지르는 비명은 달콤하다// 긴 어둠에서 17년을 버티고 나와/ 고작 두 시간 동안 치른 정사”(「어느 악기의 고백」부분)에서 화자는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더 긴 기다림”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런데, 다시 보지 않겠다는 결심은 반어(irony)에 지나지 않는다. 화자 역시 이러한 속내를 숨기는 대신 “고작 두 시간 동안 치른 정사”로 강렬하게 독자의 시선을 이끈다. ‘어느 악기’의 울림통을 통해 흘러나오는 화자의 고백은 무엇보다 뜨겁다. 이 뜨거움이 끈적함으로 남는 이유는, 세상에는 첫사랑보다 가슴 저린 사랑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단 걸 비로소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고주희의 「조니 미첼」은 뮤지션 이름이기도 하다. “조니라고 부르면 다음 생이 돌아보는 것 같다// 어깨너머로 산수국 같은 날들이 만발할 것 같다”라는 대목에서 시인이 말하는 ‘다음 생’은 ‘산수국 같은 날들’로 묘사된다. 이때 ‘산수국 같은 날들’이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부각되는 것은 색채의 이미지이다. “블루, 파랑 아니고 블루”라고 시인이 강조하는 ‘블루’는 파랑과 차별화된 색감으로서의 블루라기보다는 파랑에 정서적 덧입힘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붉은 색 덩어리로 핀 내 심장의 토양은 알칼리성”에 표출된 심장의 붉은 색도 토양의 검정색과 어울려 대비되는 이미지를 드러낸다. 고주희의 「조니 미첼」은 시각 이미지와 함께 넘실거리는 리듬의 청각적 이미지들을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가벼운 조니 미첼의 목소리가 블루 색상 물고기처럼 작품 속에서 유영한다.
김륭의 「검은 기린」은 아픈 사랑을 처연하게 묘사한다.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 또한 돌아왔다고” 여기는 화자의 심리 기저에는 ‘나’와 ‘당신’이 일체화되어 있다. 육체의 생리적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기억이란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 써버리지 못한 울음으로 가만히/ 두 눈을 꺼트”리는 화자는 그 기억에 매몰돼 있다. “우린 참/ 식물적으로 아팠지, 이런 문장 하나쯤은 서로의 입에/ 넣어줄 수 없을까?”라는 달콤한 헌사가 그것을 대변한다. 그런데 정작 ‘기린’의 모호성과 마지막 2연의 얼개는 돌연하여서 독자에게 미해결로 남는다. 이것이 작품을 다시 읽게 만드는 장치라고 본다면 「검은 기린」은 영리하다.
문성해의 「어느 구두 수선공의 독백에 부쳐」는 충실한 자서 한 편을 읽는 듯 담연하다. 첫행 “나는 발목이 없는 세계를 만지는 사람”이라는 선언은 명쾌하고도 명료하다. 발목이 없는 세계를 만짐으로써 얻어지는 세계는 화자에게 “조용하고 완벽한” 혜안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화자는 다소 장황스러우면서도 도드라질 것 없는 일상의 언어로 “삼선 슬리퍼 속애 꽂히는 유순한 발목들”을 느지막이 관찰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너무나 일상적인 민낯을 띠고 있어서 독자들을 부드럽게 무장 해제시킨다. 그리고 그 역시 “각다귀처럼 떠들썩한 세계”란 “다 달그락거리는 해골들의 각축장일 뿐”이라고 일갈한 뒤 다시 발목 없는 세계 속으로 쏙 움츠러들어 버린다. 새가 둥지에 깃들 듯 그렇게.
박지웅의 「새의 훗날」은 탄탄한 힘이 느껴진다. 부유하지 않는 언어와 부유하지 않는 정서가 조화롭게 짜여 있는 구조로 인해 독자에게 안정감을 준다. 누구든 불편함 없이 시를 읽고 싶어 한다면, 그 손에 제일 먼저 쥐어주고 싶은 작품이다.
화자는 말한다. “제가 새인지 모르는 어린 새는 길고 어두운 실개천을 따라 걷다 부리에서 흰 꽃을 피울 것이다”라고. 그가 가리키는 ‘새의 훗날’이란 “시는 뱀을 통과해 꽃이 되고/ 뱀은 꽃의 힘으로 기어가 나무로 서는” 쌍방향적인 소통과 변환이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물활론적 사고가 팽배했던 시절, 시와 뱀과 꽃이 자유롭게 동무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공간은 아닐까.
반연희의 「여기가 아닌 이야기」는 화자의 시점 이동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연에서 3연까지는 3인칭 시점이 두드러지지만, 4연에 이르러서는 주인공 서술자 시점으로 바뀌고 있다. 어조를 바꾸어가며 화자가 들려주는 ‘여기가 아닌 이야기’는 학교 현장을 들춰낸다. ‘고등어’가 ‘욕’과 ‘아이들’로 자리바꿈하는 동안, ‘욕의 기술’은 ‘고등어 굽는 냄새’를 풍기며 교실에 진하게 스며든다. “아침마다 비릿”해지는 선생과 ‘입술이 빨간 아이들’이 뒤섞인 현장은 “뼈다귀만 남은 하루”를 매번 만들어낼 따름이다. 이 이질감 속에 들어 있는 ‘나’는 “나를 빌려간 선생이 다시 돌려주지 않는” 존재다. 아무리 노력해도 선생으로 ‘돌려지지 않는’ 상실감이 화자 스스로를 학교 현장의 이물질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직시하는 주인공 서술자의 마지막 목소리는 사뭇 자조적이다.
“병원 옥상에 올랐을 때였다. 하얀 침대 시트가 아름답게 펄럭였고 비행기가 고요 속에 떠 있었다. 나는 델몬트 유리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따서 흔들어서 따라주려고 따서 흔들어서 따라주려면 잠시 울어야 했다”(신용목, 「델몬트 유리병」 부분)
신용목의 시를 읽는 사이, 저토록 시린 환영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눈앞을 서성거린다. 하얀 침대 시트의 펄럭임과 비행기가 소리 없이 떠 있는 병원 옥상의 풍경이, 이 작품의 말미 “소방대원 손에 들린 잘린 손”보다 더 우울하고 슬프다고 말한다면 과연 틀린 것일까? 틀린 생각 속에서 1연을 곱씹어가며 다시 읽는다. “울음이란 그래서 창가에 앉아 기다린다”라는 독백이 틀린 생각을 어루만져 준다. 화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방대원을 따라 “델몬트 유리병이 놓인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하얀 침대 시트가 펄럭이는 병원 옥상 위.
안차애의 「별별사주닷컴」은 제목처럼 재미있는 작품이다. 첫행 “몸 바깥의 성좌보다 몸 안에 숨겨진 별”에게서 비롯된 별의 사주는 ‘거룩한 성좌’와 ‘숨겨진 별들’, ‘고래의 별’, ‘노루의 별’, ‘검은 매의 별’, ‘빅뱅의 별’, ‘별별자의 획순마저 남김없이 흩뿌릴 별’, ‘한 줄 시의 문장에 삽입될 별’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화자의 몸 안의 별은 우주의 만상으로 이어지는 불이(不二)의 시원이 된다. 마치 화자가 의미 없는 주문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사여구들은 서로를 집약하면서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 또한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궁극의 깨침에 닿는다. 그러기에 별의 사주는 화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마침내 “한 줄 시의 문장에 삽입될 별”이 되는 것이다.
오성인의 「재난」은 ‘통증’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통증’과 불가분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비명’이다. “기울어진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살기 위해 밀치고 부딪치고 짓밟히며 달려 나온다 기습적으로 건물은 기울어지고” 이렇게 사람들과 건물이 동시에 무너지는 상황 묘사는 단순한 사고 현장이라기보다는 존재 기반의 붕괴에 가까워 보인다. 물리적 붕괴를 넘어서는 심리적 파괴가 그려지는 셈이다. 그 상황 속에서 화자는 “비명을 가지지 않은 것들은 슬프고 쓸쓸해요”라고 말한다. 화자의 생존법은 ‘비명’으로써 통증을 표출하는 것이다. 인간이 통각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통증을 외면하면 할수록 인간의 통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화자는 붕괴된 현실의 통증을 느끼며 마음껏 비명 지르라고 독자에게 조언한다. 그는 통증을 몰아낼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이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감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삶이란 “내일이면 다시 당신은 통증으로”, “나는 비명으로” 불리며 되풀이되기 마련이므로….
유홍준의 「우명(牛鳴)」은 소의 구슬픈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소를 잡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에 사는 화자는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진주에서 가장 싼 아파트, 동신아파트가 아니라/ 등신아파트죠”라고 서술한다. 이 서술이 슬픈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자학성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를 잡던 동네의 아파트가 자학의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눈동자가 구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가 살을 바르고 제 뼈까지 모두 진국을 고아 화탕지옥 속에 우려내는데도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라고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트럼팻을 불 수 없는 자신을 ‘밤을 견디는 무덤의 소’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일견 탁월하다(이 작품의 모든 비유가 그러하다) 그러나 도륙된 소의 절대적 비의 앞에서 그것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화자의 자학성이 슬픈 이유다.
「외아들의 세계」라는 제목은 그 복고적 뉘앙스로 인해 독자를 번민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그것이 의도된 전략이었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디테일하게 묘사된 체험과 감정선에 비춰볼 때, 이 작품의 화자는 최금진 시인의 자전적 화자로 읽힐 수밖에 없다. 자전적 화자의 2인칭 시점으로 작품 속에 화자의 연대기가 그려진다. “수미상관의 구조, 너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라고 정의하는 ‘외아들의 세계’는 화자에게 녹록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늘 “자신과는 연결되지 못한 채/연들이, 풍선들이, 거품들이,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결국, 외부 세계와 연결되지 못하는 화자는 고립된 세계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너는 외아들이고/ 불을 켠 창문 앞에서 너는 너를 응시한다/ 너는 너를 뜯어먹으며/ 몰락한다”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된 시집 두 권과 시 열 편을 살펴본 지금, 그들과 함께 당도하는 죽음의 의미를 간파하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되짚는 일은 다시 시인 자신에게 넘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만의 몫이어서는 안 된다. 시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평가의 전권이 문학인에게 주어지는 현실부터 거슬러서 되새김질해야 한다.
해마다 문예지들은 ‘올해의 시’ 선정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간추려진 작품들에서 시의 죽음에 이르는 핍진성을 찾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와 시인, 독자의 거리가 벌어져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천착해야 할 핍진성은 되레 ‘올해의 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자성론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내놓는 ‘올해의 시’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이 글의 화두로 삼은 시의 죽음(혹은 위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시가 독자뿐만 아니라 시인으로부터도 멀어진 현실을 보다 엄중히 바라보고, 그 이유를 허심탄회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올해의 시’는 시와 시인, 독자가 한 데 어우러지는 마당이어야 한다. 이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돌아봐야 한다(고백건대, 이것은 내 자신에게 제일 먼저 던지는 질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올해의 시에 내포된 죽음의 핍진성은 한편으론 죽음을 설명하는 합리적 기제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시의 회생을 설명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의 단상을 통해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시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