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라 적고 뿌리라 읽는다. 바다는 위미 사람들의 처음 고향이자 마지막 고향이다. 고향을 떠나 있다 할지라도 위미 사람이라면 필시 뿌리 한 가닥쯤 고향의 바다에 내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남겨놓은 뿌리 가닥들이 모여 해안의 포말을 흔든다. 그러기에 위미 바다는 짙푸르게 술렁인다. 고정국이 바라보는 바다도 그러하다. 위미를 떠난 시선은 “겨우내 윗목에 누워” 그리움으로 뒤척인다. “어젯밤 잠을 설친 돌섬”처럼 시인의 젖은 이마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다.
위미는 서귀포시 남원읍에 자리 잡은 해안가 마을이다. ‘爲美’라는 한자 표기에서 드러나듯, 마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정신적 지향점으로 삼아 살아간다. 이 아름다움이 ‘어진 마음’이면 어떻고, ‘인심’이거나 ‘허물없음’이면 어떻고, ‘예술적 가치’이면 또 어떠한가. 이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헤쳐모여 위미를 형성한다.
위미2리 복지회관 입구에는 소암 현중화의 글씨를 담은 표석이 서 있다. 이 표석의 ‘爲美’는 행인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빙긋 웃게 만든다. 이 천진난만한 글씨는 여러 표정을 담고 있다. 이것은 웃는 얼굴이지만 우는 얼굴이기도 하다. 머리깃을 세우고 꽁지를 내린 새의 모습이기도 하고, 하늘을 굳건히 받치고 선 사람의 자세를 닮아 있기도 하다. 어쩌면, 위미의 ‘美’를 가리켜 함부로 예단하거나 정의내리지 말라는 소암의 뜻은 아닐까?
‘위미’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1416년경 3읍 체제로 개편된 제주 마을 명칭들을 문자 정리하던 즈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로부터 마을의 지형이 소꼬리를 닮았다 하여 ‘牛尾’라 불렸는데, 이것을 한자 표기하는 과정에 실수로 ‘又尾’라고 오기하였다는 것이다. 1750년(영조 26년) 펴낸 전국군현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에 실린 ‘제주삼현도’에서도 ‘우미(又尾)’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爲美’라는 명칭으로 정식 사용된 것은 1915년 제주도로 행정개편이 이뤄지면서부터다.
「내고향 봄바다엔」에서 시인은 “가슴에 남은 흉터 하나”를 열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흉터를 통해 시인은 섬비탈의 ‘토종동백’과 정서적 연대를 이룬다. 그 흉터는 “세월의 뒷켠에 숨어 떠난 자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흔적이다. 시인의 가슴에 질기게 남아 있던 붉디붉은 흉터들이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뚝뚝 지고 있다. 마치, 눈물 숨기며 서둘러 돌아서는 여인네 뒷모습처럼. 콧잔등에 내려앉는 뭉클한 바람은 그 때문이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의 이국적인 풍경은 현맹춘 할머니(1858~1933)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17세에 남편의 고향 위미에 정착한 뒤, 물질을 하며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황무지를 사들였다. 하지만,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황무지에 부는 거센 바람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고심 끝에 한라산의 동백나무 씨앗을 받아와서 황무지 둘레에 한 알 한 알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씨앗들이 발아하여 제대로 뿌리 내리기까지, 그녀는 끊임없이 심고 가꾸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그녀가 맨손으로 일구어낸 동백 씨앗들은 아름드리로 자라나 울창한 동백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맨손 자국 따라 동백나무 군락지를 두런두런 거닐다 보면, 새빨간 토종 동백이 흩어진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다. “어떻게, 그리움이 변하니……?”
누군가에게 그것은 별이다. 별이 아니지만, 한 번도 별이 아닌 적 없는 곳, 시인의 언어가 부러움을 자아낸다. 다만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필름처럼 고향을 차례차례 소환하고 있는 언어 너머의 마음, 따뜻한 향수다.
자고 일어나면 한 겹 한 겹 벗겨져 가벼워지는 시간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행복하거나 고통스러웠던 한때의 시간들과 결별한다. 서서히 결별이 쌓이면서 희미해지는 기억으로 인해 우리가 새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궤변일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궤변이라 진단하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김원욱에게 ‘위미’란 점점 커져가는 기억이다. 이 기억의 놀라운 역주행은 현재진행형이다.
시인이 지목한 “푸르고 환한 별” 중 하나는 마을회관 앞 상징석 ‘ET’일 것이다. 당장이라도 가느다란 목을 능청스럽게 빼고 악수를 청할 듯 해학적인 모습. 불법으로 팔려나갔던 이 돌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섰던 마을 청년들에게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노력과 남다른 안목 덕분에 ‘ET’는 마을의 상징석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망물’은 시인의 표현대로 “콸콸 콸콸 마구마구 솟아”나는 지상의 별이다. 이곳은 바다와 내(川)가 만나는 경계인데, 청량한 민물이 솟아나 위미 마을의 옛 식수원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고 한다. 가뭄에도 마른 적 없다는 이 고망물은 유난히 시원하고 물맛 좋기로 유명하다. 1940년대, 인근의 황하소주공장에서도 이 물을 이용해 소주를 생산하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대낮인데도 고망물을 내려다보니 잔뜩 잠겨 있던 별들이 반짝거리며 반사돼 온다.
고망물 옆에는 물허벅을 진 여인상이 서 있다. 고망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하던 옛 어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의도였을까? 수건 질끈 매고 무거운 물허벅을 진 제주 아낙네의 매무새에서, 안온함보다는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아낙은 필시 물질과 밭일을 끝내고 돌아와 저녁 준비하려고 물 긷는 중이었을 것이다. 몹쓸 오버랩이 잔잔했던 가슴자리에 파문을 던진다.
마을 사람들은 ‘자ᆞ배머들코지’를 ‘자ᆞ배머들 벌러니코지’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마주 선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앵글에 담긴다. 또한 다 담아내지 못한 빛들도 앵글 밖에서 각각의 위용을 드러낸다. 그곳으로 나를 안내한 시인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여기가 위미 문화의 발생지”라고 소개하였다. 본래 자ᆞ배머들코지에는 70척 넘는 비룡형(飛龍型), 문필봉형(文筆峯型) 기암괴석들이 서 있어서 예로부터 이곳은 마을의 번성과 인재의 출현을 기대하던 신앙적 성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백 년 전쯤 이 성스러운 기상을 내다본 외지인의 계략에 속아 기암괴석들을 파괴해버리자, 그후 위미 마을에는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ᆞ배머들코지는 우여곡절 끝에 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1998년 9월 복원되었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휴대폰이 없던 시절 위미 마을의 청춘 남녀들은 이 신성한 장소에서 스스럼없이 만나 풋풋한 사랑을 나누곤 하였다. 마을의 정신적 성소와 만남의 공간이라니! 이 탄력적 장면 전환이야말로 자ᆞ배머들코지의 뜻밖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마을 사람들에게 친근한 생활 쉼터로 자리 잡은 건, 당연히 후자의 활용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자ᆞ배머들코지에서 청춘들은 “더 높이 설레인다”. 그들은 그리운 순비기꽃을 향해 그침 없이 넘실거린다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일어나면 또 쓰러지는” 파도처럼…….
순비기꽃이 그리우면/ 파도는/ 더 높이 설레인다.
너가 나의 눈을 가리고/ '누구게'하듯,/ 파도는/ 순비기꽃을 바로 쳐다보질 못한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늬바람 부는 고향
숱한 무너짐의 끝에서/ 이제/ 휘파람으로/ 떠올라라.
파도의 잠을 깨우는 것은/ 순비기일뿐.
어머님이 물질 나갈 때/ 잠수경을/ 맑게 닦아주는 순비기일뿐,
해녀들의 숨비질소리가 닿아야/ 비로소/ 피어나는 순비기야
쓰러지면 또 일어나고/ 일어나면 또 쓰러졌던/ 우리의 엄청난 서러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순비기가/ 줄기 줄기로 뻗어/ 세상의 맥(脈)을 이루듯,
파도의/ 줄기 줄기가 뻗어나와/ 바다의 맥(脈)을 이루듯,
너의 질긴 줄기 끝에/ 오늘은/ 외롭게 나앉은 고향마을.
그 마을이/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것은/ 순비기꽃이/ 피지 않았음이다.
파도가 아직/ 고향의 그리움을 지우지/ 못했음이다.
― 안정업,「파도」
장면3. 島
가을이면 바다도 등푸른 빛깔이다
섬과 섬 사이로 떼지어 도는 물결
저 물결 한 접시 뜨면
펄떡펄떡 튀겠다
여기는 남녘의 끝,
더 이상은 못 가리
총각 미당마저 눌러 앉힌 지귀도
주인집 ‘고을라의 딸’에
홀려버린 섬이렸다
눈이 항 만했던 그 해녀 어디 있나
이 섬에 물질 왔던 내 어머니 어디 있나
갯바위 자맥질하듯
순비기꽃 터지겠다
― 오승철,「지귀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산 146-164번지, 지귀도(地歸島)는 야트막한 섬이다. 지귀도라는 지명은 ‘땅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태’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섬 지형이 편평하다는 데서 나온 민간 어원설의 설명이다. 지귀도의 위치는 남원읍 위미리 해안에서 남쪽 약 4km 지점이다. 현재 사람이 살지 않지만 과거에는 사람들이 보리농사와 바다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오승철의 「지귀도」에 등장하는 고을나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그 시절 ‘총각 미당’을 먼저 소환해야 한다.
“地歸는 濟州南端의 一小島. 神人高乙那의 孫一族이사러麥作에從事한다.丁丑年榴夏, 廷柱가偶然地歸에流謫하야 心身의 傷痕을말리우며 써모흔것이 卽 이하 네 片의 詩作이다.”
미당은 『화사집』의 「정오의 언덕에서」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귀도 시절의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하였다. 만일 그가 살아 있어서 고을나의 딸에 얽힌 이 에피소드를 읽는다면, 허,허 웃으며 디테일한 장면들을 첨삭해줄 것만 같다. 지귀도의 ‘총각 미당’은 뜨거운 로맨티스트였다.
미당이 위 글에서 언급한 내용 중 몇 가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첫째, 그는 “廷柱가偶然地歸에流謫하야”라고 밝혀놓는다. 그는 1937년 여름께(丁丑年榴夏) 지귀도에서 약 6개월 간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급에 따르면, 이 기간이 그에게는 ‘유적(流謫)의 시간’이었다는 설명이다. ‘유적’이란 죄인을 귀양 보내는 일을 가리키던 말이다. 위의 문장에서 미당이 자신을 ‘정주가~’라고 하여 객관화하고 있는 점을 상기한다면, 인적 드문 곳에 ‘그를 유적한 자’에 대한 추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정주가’ ‘은거지에 유적하도록’ 방기하거나 유도한 주체는 다름 아닌 미당 자신이며, 이것은 의외로 그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이 ‘지귀도’였다는 사실만은 우연한 결과였을 개연성이 크다.
둘째, 미당은 왜 스스로를 은거지에 밀어 넣었을까? 이 추정은 그가 언급한 “心身의 傷痕을 말리우며”라는 대목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그는 「벽(壁)」이라는 작품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1936)를 통해 등단한 신인이었다. 같은 해 11월 김광균, 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동인지는 이듬해 1937년 12월 종간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심신의 상흔’이란 그가 동인지를 내고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빚어졌을 마찰과 등단 후 겪는 일시적 슬럼프, 일제치하의 상황 등이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창간한 동인지를 뒤로 한 채 제주 남단의 섬으로 숨어버릴 만큼, 그의 상흔은 컸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을 외딴 섬에 온전히 기탁하기 위해 스스로를 객관화하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당의 객관화 작업은 자신을 엄격히 들여다보고 진단하기 위한 치유 행위의 단초인 셈이다.
셋째, 미당이 상흔을 치유하며 작업한 ‘네 편의 시작’은 모두 ‘고을나의 딸’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머리카락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바다에 떠보이면 아름다우렸다”(「고을나의 딸」)라고 묘사한다. “석벽 야생의 석류꽃열매 알알 입설이 저… 잇발이 저…”라는 대목에서는 뺏겨버린 사내의 마음도 엿보인다. 마음 뺏긴 사내는 저돌적이었던 것 같다. “모래속에서 이러난목아지로/ 새벽에 우리, 기쁨에 오열하니/ 새로자라난 치(齒)가 모다떨려”(「웅계(上)」)라거나,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웅계(下)」)라고 부르짖고 있으니…. 그리고 그는 “다붙은 내입설의 피묻은 입마춤과/ 무한 욕망의 그윽한 이 전율”(「정오의 언덕에서」)로써 “우슴웃는 짐생, 짐생 속으로”(「정오의 언덕에서」) 뛰어들 것을 기약한다.
4편의 시편들 속에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뜨거움 없고,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욕망이 없다. 체험의 창작적 변용을 이해하고 감안하더라도, 다 열거 못한 시행(詩行)까지 모조리 끄집어낸다면 그것들을 예시하는 데서 이미 미당의 지귀도는 완성되고도 남음이 있다.
‘총각 미당’은 열정적이었으며, 그가 지귀도까지 품어갔던 상흔은 그 뜨거움을 통해 치유되었다. 미당은 지귀도의 강렬한 스토리텔링을 몸소 실천하고 남겨놓았다. 이 아름답고 특별한 문화를 잘 살린다면 지귀도를 포괄하는 위미 관광자원으로서도 활용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지쳐있던 미당에게 예술혼을 북돋워준 ‘고을나의 딸’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지귀도를 방문한다면 바람결에 묻어나는 뮤즈의 흔적을 느끼고 싶다.
장면4. 峰
위미리와 한남리,
의귀리와 수망리
대바구니 엮어내듯 휘휘 엮은 서중천이
더러는 가다가 말고
불빛이나 훔쳐본다
어느 마을에나 봄이 오고 꽃은 피어
4.3도 칠십여년
지칠 만큼 지쳤는데
자배봉 골짝 흔들며 장끼가 다시 운다
― 오승철,「지귀도」
“4.3도 칠십 여년”, 4.3이 일반명사가 되어가는 동안 자배봉은 말없이 위미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기억을 ‘괜찮다, 괜찮다…’ 어루만지는 조부처럼. 인자한 얼굴이 옛빛 그대로다.
젊은 세대에게 ‘4.3’이란, 때로 엄청나거나 때로 고리타분한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별스러울 것 없는 역사교과서 한 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4.3’을 기억한다는 건, 그 방식과 해석이 무엇이든 다 일리 있다고 말한다면 억지일 것인가. 삶에는 한 가지 원칙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배제하거나 편집(偏執)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4.3’은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것은 엄연히 삶이었으며 삶으로서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4.3’ 해석에 있어서 그것만의 잣대가 따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되레 구태일 수 있다.
자배봉이 바라보는 ‘4.3’의 흔적 역시 그러하다. 자배봉은 그 어떤 흔적도 밀어내거나 감추지 않고 그것 그대로를 변함없이 바라본다. 그 옛날 ‘4.3’의 현장에서도 자배봉은 흔들림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미 마을은 담연히 4.3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자배봉이 내려다보는 해안가의 ‘볼레낭모쉥이’는 언뜻 보면 여느 제주해안가 암반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사연을 듣고 나면 기괴한 모양새의 암반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원래 이 일대에는 30호 가량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지만, 4.3의 와중에 전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무장대와 군경 사이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던 주민들이 그들만 아는 장소를 찾아 숨어든 곳이 바로 ‘볼레낭모쉥이’였다는 것이다. 저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많게는 20명 정도가 협소하게나마 숨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하니, ‘천혜의 자연’이라는 말이 울컥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 표석으로만 남은 자배봉 정상의 고인돌을 본다. 그 오래 전 원시인 부족이 저 무거운 돌을 오름 정상으로 옮겨놓고 권력자의 죽음을 애도하던 때, 그들은 의도했던 ‘숭고한 죽음’ 대신 후세 사람들이 ‘표석’만을 기리게 될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의미’는 세월 속에 왜곡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왜곡 또한 자연스러움이라는 걸 고인돌은 알고 있는 듯하다. 아무려면 어떠랴,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을. 자배봉에 오르면 모든 현실이 한결 가볍고 여여해진다.
위미爲美 우친내, 어린 한때 몸 들었던 초가 담장 옆
먹쿠슬 열매 떨어질 때마다 주머니 가득 파도소리 주워 담던 그날처럼 하늘 가까이 걸려 있는 한라산, 저 눈 녹으면 푸르르르
이파리 돋아나고 큰 바다 일어서서 오겠지
― 김원욱,「먹쿠슬낭」
김원욱의 시처럼 “눈 녹으면 푸르르르/ 이파리 돋아나고 큰 바다 일어서서 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의 삶이란 그 자연 속의 미미한 먼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