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 동안의 경험
나는 언제나 학교가 싫었다. 관심도 없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수업. 친구들과의 부진한 관계. 평가하고 줄세우는 시험 제도에 이르기까지, 학교는 내게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 주는 공간이었다. 권위와 규제, 불편함과 부조리의 공간이었다. 12년간 초, 중, 고등학교 교육까지 마치고 성인이 되었지만 나는 12년간 잘 배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12년간 내가 대체 뭘 배웠는가 하는 허무함이 더 많이 들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아무리 돌이켜 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 길던 수백 수천 시간의 수업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배웠다는 말인가. 고전 시가의 해석을 외우고, 끊임없는 수학 기출 문제를 풀고, 영어 지문을 밑줄 쳐 가며 독해했지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다. 전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즉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는 최소한 나라는 인간을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들이 성공한 것이라면 12년간 한 사람의 인생을 의자 위에 묶어 두고 경쟁과 좌절과 우울로 고문한 것뿐이다. 만약 나를 해코지할 마음이 있었다면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그러고도 나는 또 학교에 갔다. 대학교라는 곳이었다. 다들 입을 모아 대학교는 초, 중, 고등학교와 다르다고 했다. 더 자유롭고, 더 즐거운 곳이라고. 진정한 학문의 전당이라고. 그러나 내가 2년 반 동안 다닌 대학교는 이전에 다녔던 학교들과 딱히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학교에서 ‘배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다. 웃기는 일이다. 학문의 장이라고 칭송받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정작 누구보다도 배움의 부재를 깊이 체감하고 있으니.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봤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왜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움을 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 보자.
첫째, 머무름이 없다. 학교에는 정해진 교과과정이 있다. 학생이 입학하기 전부터, 학교는 그 학생이 배워야 할 과목과 그 분량을 모두 정해 둔다. 입학한 학생에게 그 과목을 들을지 말지 선택권은 없다. 무조건 들어야 한다. 설사 학생이 그 과목을 들을 준비가 안 되었더라도, 무조건 들어야 한다. 그 결과 배움이 아닌 노동이 일어난다. 학생들은 손톱만큼도 궁금하지 않은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고통스러운 노동을 한다. 그리고 교수는 정해진 만큼 진도를 나가야 한다. 나는 강의를 들으며 교수들이 진도 나가기에 급급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혹은 이해에 시간이 더 필요한데 계속 앞서나가는 진도를 따라가기 버거울 때도 많았다. 더 생각하고, 더 궁구하고, 더 곱씹어야 할 것 같은데, 계속 진도만 나간다. 학문의 세계에서 ‘머무름’이 없었다. 그저 오늘 이만큼 배웠으면 다음에는 저만큼 배워야 한다는 식이었다. 나는 종종 뒤쳐졌고, 학기말 성적은 나를 실패자로 취급했다.
둘째, 수업 방식이 학생이 아닌 교수와 학교의 이해에 맞춰져 있다. 뉴턴 시대로부터 40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교실의 풍경은 바뀐 것이 없다. 교수는 앞에 서서 강의하고, 학생들은 앉아서 강의를 듣는다. 이는 최소한의 교원으로 최대한의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다. 교수를 많이 채용해 비용을 늘리고 싶지 않은 학교 측의 이해에 맞춰진 교육 방식이다. 뉴턴 시대와 달라진 거라곤 요 몇십 년 새 전자기기의 발달로 교수들이 더 이상 손목 아프게 판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교수들의 편의에 맞춰진 방식이다. 직접 필기하고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하는 방식에 비해, 슬라이드를 휙휙 넘겨가며 설명하는 방식은 교수자는 편할지 몰라도 학생들에게는 불리하다. 강의 속도가 훨씬 빨라지는 탓이다. 그 덕분에 이해할 시간은 더 줄어든다. 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일방적인 정보 전달 방식은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학생은 교수의 말에 2시간 넘게 100% 집중할 수 없고, 자칫하다가는 학생의 이해를 도외시한 교수 혼자만의 수업이 되어 버리기 일쑤다. 왜 대학에서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지 않는가?
셋째, 평가가 배움을 없앤다. 빠르게 나가는 진도와 마찬가지로 학기마다 두 번씩 있는 시험은 학생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시험 성적이 낮으면 취업에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학생들이 제대로 된 배움보다는 협박에 쫓겨 지식을 욱여넣게 만든다. 당연히 이는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배움을 방해하는 행위다. 제대로 된 배움은 즐거움과 느림을 동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잦은 시험은 엄청난 압박감으로 학생들을 괴롭힐 뿐더러 그들이 진정한 배움을 가질 기회를 앗아간다.
이렇듯 나는 학교에 불만이 많다. 이 학교에서 아마 가장 불만이 많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불만이 큰 이유는, 나는 혼자 공부하면서 진정한 배움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내가 부진했던 과목을 천천히 공부하며 더 깊은 이해와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진작 이렇게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학교가 원망스러워졌다. 아이작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입학했을 때,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학문 체제를 가르치는 교육 과정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즈음에는 거의 무너져 있었다. 교수들은 뉴턴이 뭘 하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뉴턴은 이런 느슨한 분위기에서 자기만의 공부와 자기만의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과연 뉴턴이 빡빡한 교과과정 속에서 빠른 진도와 잦은 평가에 시달렸어도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학교가 오히려 진정한 배움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학교는 마치 학문 공장으로 변해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