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가 부럽다

원하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 자유에 대하여

by 생각하는 쥐

우리 할머니는 평생 숨가쁘게 사셨다.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세 아이를 키우면서 생계까지 책임지느라 버거운 노동을 해야 했다. 70세까지도 음식점에서 일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류사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니는 생계만 유지할 수 있었다. 세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손에 남은 건 아주 약간의 돈뿐이었다. 그래도 노후엔 큰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임대주택 덕분에 주거비용을 아낄 수 있었고 자식들이 약간이나마 용돈을 보태 준 덕에 할머니는 그럭저럭 괜찮은 노후 생활을 보내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머니를 '부럽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나는 대한민국이 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부국의 반열에 오른 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금전적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실제로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기까지, 나는 지금 돈이 없을까 봐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인생이 부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된 노동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던가. 다만 나는 할머니의 상황이 부럽다.


할머니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으신다. 누구도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노동을 하여 돈을 벌거나, 교육을 받아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거나,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본인이 하고 싶으신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 70년간의 노동 끝에 주어진 짧은 휴식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청년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는다. 높은 학점을 받아야 하고, 좋은 직장을 잡아야 하고,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것들을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는 게 싫다. 여기에 내 시간을 뺏기는 것도 싫다. 고등학교 이후로 나는 수업시간을 항상 '견뎠다'. 이 말은즉슨 수업은 고통을 꾹 참고 견디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학문 자체에는 유감이 없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방식에는 유감이 크다. 나는 학교에서 정한 방식과 속도대로 배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강요는 내게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성적을 받으려면 억지로 나를 끼워맞추고 통제해야 한다. 이는 또다른 고통이다. 또 미래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고민은 나를 항상 좀먹는다.


학교 도서관에 들어서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낀다. 호기심의 욕구다. 책들이 저마다 고개를 들고 제발 나를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앎을 유혹하는 금단의 보물창고'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이 욕구를 꾹 참고 전공책을 펼쳐야 한다. 교수들이 가르친 내용을 암기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불만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나는 책에 맘껏 파묻히고 싶다. 뛰어난 지성들이 평생에 걸쳐 써내린 문헌들을 마음껏 탐독하고 즐기고 싶다. 그러나 내가 성적을 유지하려면 전공서적 외 책에 대한 접근은 극도로 제한된다. 기계공학 역시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나는 그것만 공부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특히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정해진 내용을 공부하고 싶지 않다. 눈앞에 탐스러운 앎의 과실이 있는데 쳐다볼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아는가?


따라서 나는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왜 내가 이래야 하는가. 왜 평생을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시간을 견디고 죽이면서' 살아왔는데 아직도 이래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정말 산업자본주의 속 지식 기계에 불과한가? 내게는 자유가 없는가?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부럽다. 내가 할머니라면, 나는 자리에 앉아 이 아름다운 책들을 음미하며 삶을 한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공책이나 달달 외우고 있는 지식 기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자유를 모색한다. 아직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지만, 나는 내 삶의 자유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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