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윤의『철학하는 과학 과학하는 철학 1 과학철학의 시작』을 읽고
자신의 과학을 철학적으로 반성해보지 못한 과학자는 결코 조수나 모방자를 벗어날 수 없고, 특정 분야의 자연과학에 종사해보지 못한 철학자는 결코 어리석은 철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콜링우드-
과학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과학'을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으로 정의했다. 그럼 철학이란 무엇인가? 동 사전은 '철학'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얼핏 비슷하다. 둘 다 '현실세계'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다.
그럼 인간은 왜 과학과 철학을 탐구할까? 지금이야 과학기술은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자루이고 과학자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만 아주 오랫동안 과학과 기술은 별개였으며 과학자와 기술자들 사이엔 접점이 없었다. 요컨대 과학이 유용한 학문이 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하물며 철학이야 말할 것 있으랴. 인류 역사 대부분 지역, 대부분 시기에서 내가 "현실세계의 근본원리는 무엇일까? 새는 어떻게 날고 돌멩이는 어떻게 구르며 내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따위의 생각을 할라치면(이것만으로도 이미 매우 드문 일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뒤통수를 후려치며 "이놈의 자식아. 멍 때리지 말고 사냥·농사·장사·채집 나갈 준비나 해!"라고 소리쳤을 광경이 눈에 훤하다. 혹여나 운이 좋아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생각은 금세 사그라들었겠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런 질문은 "밥도 떡도 안 나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하는 편이 생존과 번식에 훨씬 유용하다. 실제로 다른 어떤 동물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전자의 명령-한 마리의 자손이라도 더 남기고, 한 입의 음식이라도 더 입에 넣는 것-을 충실하게 이행할 뿐 그 이상은 상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 신경계가 어떻게 작용하기에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아마 다른 동물에는 없는 인간 뇌의 특징 중 하나이리라. 따라서 '어떻게'는 모른다. 그렇다면 '왜'는 어떤가? 인간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단순히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 신경계에 현실세계의 보편적 원리를 궁구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당장 나만 봐도 그런 생각 없이 살았을뿐더러 가끔 떠오르는 생각마저도 '쓸데없는 생각', '머리 아픈 생각'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렸다. 이는 내가 전에 쓴 '그런갑다 하는 인간'에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만약 내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서 "왜 당신은 세속의 다른 일들을 내팽개친 채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을 쏟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그 사람들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죽었으니 직접 답을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측컨대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그럴 능력이 있고, 거기에 더 높은 의미가 있는 듯해서." 그렇다. 첫째로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 의미를 궁구할 능력이 있었다. 둘째로 여기엔 뭔가 '더 높은 의미'가 있는 듯했다. 단순히 다른 동물들보다 조금 더 똑똑해서, 움막을 짓고 덫을 치고 창을 만들어 쥐며, 뗀석기를 휘두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인간을 저 높은 우주로 올려줄 것 같은 높은 의미가. 바로 이 의미가 세속의 생존·번식과는 하등 상관없는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도록 끌어당긴 이유가 아닐까.
음, 이런 이유가 너무 거창한 것 같은가? 실제로 철학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뭘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세요?"라며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높은 의미'보다 단순한 '호기심'을 따랐을 수 있다. 실제로 저자도 철학자들은 세속의 욕망이 아닌 "세계의 근본 원리를 향한 호기심"이라는 단 하나의 동기를 가졌다고 말한다. 둘 중 무엇이든 가능하다. 둘 다 가져도 되고.
자, 이제 대충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정도는 알았다. 그럼 과학과 철학으로 대표되는 그 생각은 정확히 어떤 구조를 갖고 있을까? 즉 인간 별종들의 관심분야는 무엇일까? 다시 한 번 '과학'과 '철학'을 정의해보자. 앞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두 단어를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 정의는 너무 모호하다. 여기에 따르면 철학은 과학이고 과학은 철학 아닌가. 실제로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같진 않으니 다시 정의해 보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감각으로 알아챌 수 있는 실제(actual)를 탐구하는 일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이성으로 알아챌 수 있는 실재(real)를 탐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과학은 형이하학, 철학은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다시 한 번 표준국어대사전을 인용하면, 형이하학은 "형체를 갖추고 있는 사물을 연구하는 학문.",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현실세계에서 형체를 갖춘 사물은 감각을 통해 알아챌 수 있다. 즉 실제(實際)한다. 설사 원자 단위 크기의 사물이라 맨눈으로 볼 수 없어도 관측 장비를 사용하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런 사물을 관찰함으로써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귀납추론이라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신의 감각과 보조 장비를 동원해 무엇이 실제하고 어떤 법칙을 따르는지(자연법칙은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분명히 형체가 있다.) 찾고자 한다.
반면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 원리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감각으로 알아챌 수 없다. 이는 오로지 이성을 동원해야만 실재(實在)함을 알아챌 수 있다. 형체가 없는데 어떻게 허상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맞다. 허상이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 밀접한 허상이다. 현실보다 더 날카로운 허상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라고 정의한다. 곧 보겠지만 감각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이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과학과 철학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아보자. 과학자들은 사물을 지각하고, 귀납 추론과 연역 추론을 이용해 소위 '법칙'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이 법칙이 현실세계를 기술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때때로 이 법칙은 좀 허술한 경우가 많다. 귀납추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철학이 하는 일이 바로 이 구멍을 지적하는 일이다. 철학자 콜링우드는 과학과 철학의 이런 관계를 비추어 이렇게 말했다. "자연적 사실에 관한 세부 연구를 '과학'이라 말하고, 과학에 대한 반성을 '철학'이라 한다." 철학이 과학에 던지는 대표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 법칙을 어떤 방법으로 얻었는가?", "그 방법이 합리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최종적으로 그 법칙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 법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만약 철학이란 걸 모르는 과학자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몹시 당황하리라. 이렇듯 철학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근본 지식'을 의심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만약 이런 질문이 없다면, 과학자는 사물에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때문에 과학자는 반드시 철학자여야 하고, 철학자는 반드시 과학자여야 한다. 의식 연구로 유명한 대니얼 대닛이 바로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인' 가장 좋은 예이다.
이제 핵심은 다 얘기했다.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과학-철학 간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상세히 보여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과 귀납·연역추론, 귀납추론의 오류와 순수연역추론인 논리학과 기하학 등 정말 많다. 만약 이 글을 읽고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관심이 생겼다면, 꼭 『철학하는 과학 과학하는 철학 1 과학철학의 시작』을 읽어보라. 당신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정말 좋은 책이다. 초심자에게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