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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는 쥐

자본으로서의 인간과 교육(1)

<교육의 차이>를 읽고 나서 던진 세 가지 질문

by 생각하는 쥐


김선의 <교육의 차이>를 읽으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교육제도와 그 현황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유익했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독서였다. 독일, 영국, 미국, 싱가포르, 핀란드의 5개 국가를 돌아보면서 나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라에 따라 교육은 한 인간의 성장이기도 했고, 전인(whole people)의 제조이기도 했다. 또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재산’이기도 했으며, 세상과의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교육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다르고, 교육이란 무엇인지 확립된 정의가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어떻게 교육을 정의하고 있을까? 우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교육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명사」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교육이 무엇이냐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이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지식과 기술’에 더 중점을 두느냐(그리고 그것을 금전적 가치로 치환하여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느냐) 아니면 인격 성장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아, 그리고 ‘길러 줌.’이라고 정의하느냐(인간에 교육을 투입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기르도록 도움.’이라고 정의하느냐(옆에서 돕지만 특정한 형태로 가공하려 하지 않으려 함)의 차이도 있겠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독일은 인격 성장에 중점을 두고 ‘길러 주는’ 교육관을 가진 국가일 것이고 영국은 인격 성장에 중점을 두며 ‘길러 주는’ 교육관을, 미국과 싱가포르는 지식과 기술 습득에 중점을 두고 ‘길러 주는’ 교육관을 가진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핀란드는 인격 성장에 중점을 두고 ‘기르도록 돕는’ 교육관을 가진 국가일 것이다. 표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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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이 질문들은 너무나 중요해서 꼭 답해야 한다.

첫째. 교육을 통해 인간을 부가가치를 더한 상품(인적재산->인재)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인적자본이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을 인간의 인격 성장을 위한 교육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둘째. 어째서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 현대 능력주의 교육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셋째. ‘교육’이 우리 종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교육에 적합한 종인가? 즉, 우리는 ‘호모 에듀니쿠스’인가?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겠다. 오늘날 ‘교육받은 사람’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가지는 차이는 크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더 높은 사회적 위치와 더 많은 금전적 재산(이것이 사실상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을 가지는 반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무일푼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교육은 ‘인간에게 부가가치를 더해주는 것’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이유도 딱 하나다. ‘내 자식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보유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기 위해서’. 이 당연한 사실을 이론으로 만든 게 바로 인적자본이론인데, 여기서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적자본론에 따르면 학교교육이나 훈련 등을 통한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는 수익과 비용을 수반하게 되는데, 투자에 대한 수익은 동일한 교육이나 훈련에 대해서도 개인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고, 투자에 대한 공급은 가정배경이나 인적자본 투자에 필요한 자금의 차입능력과 같은 기회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의 수익과 비용의 차이가 개인간의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량의 차이를 발생시키고, 이는 다시 인적자본의 질적 차이를 유발하여 생산성의 격차를 초래함으로써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수준의 결정에 영향을 주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적자본론 [人的資本論, Human Capital Theory] (HRD 용어사전, 2010. 9. 6., (사)한국기업교육학회)”

위 인용문을 자세히 보면 인간을 ‘인적자본’이라 부르며 교육을 ‘투자’하여 경제적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간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다르며(고효율의 인적자본이 있는가 하면 저효율의 인적자본도 있다) 투자는 개개인마다 천차만별로 이루어지고 따라서 많은 투자를 받는다면 더 높은 효율을 내게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높은 수익을 내는 ‘인적자본’이 더 많은 임금을 받아 재산축적을 함으로써 높은 사회(High Society)로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너무나 널리 통용되고 있어 사실 거창하게 이론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소개할 것도 못 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바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일종의 자본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거기에 부가가치를 붙이는 가장 유용하고 많이 쓰이는 수단이 교육이라고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다른 수단으로는 의술이나 운동으로 외모자본에 부가가치를 붙인다거나 하는 것이 있다. 이것들도 많이 쓰이지만 교육만큼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고, 선호도도 떨어진다). 따라서 만약 인간의 인격 성장을 위해 이루어지는 활동도 ‘교육’이라 부른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지식과 기술 습득’과 ‘인격 성장’을 위한 활동은 서로 별개로 분리되어야 한다. 왜냐면 인격 성장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최근에는 인성평가라는 수단으로 인격마저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려고 하지만 인격은 정량평가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므로 별개의 이름을 붙인다면, 인적자본이론에 의한 부가가치로서의 교육(지식과 기술 습득)은 ‘인적자본 교육’, 인격 성장을 위한 교육은 ‘인격성장 교육’으로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두 번째 질문은 왜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 관료들은 ‘기회의 평등’을 입에 달고 살지만 두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다. 이것을 인적자본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자면 인적자본에 따른 투자 대비 수익률이 낮은 자들은 사회의 밑바닥으로 걸러지고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은 자들은 사회의 상층으로 올라서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정확히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관료들이 주장하는 바이며 다른 말로 ‘능력주의’라고 한다. ‘투자 대비 수익률’, 즉 ‘능력’이 우수한 자들은 부가가치를 덕지덕지 붙인 상품으로서 달콤한 과실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앞서 인적자본이론에서는 “투자에 대한 공급은 가정배경이나 인적자본 투자에 필요한 자금의 차입능력과 같은 기회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의 수익과 비용의 차이가 개인간의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량의 차이를 발생시키고, 이는 다시 인적자본의 질적 차이를 유발하여 생산성의 격차를 초래함으로써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수준의 결정에 영향을 주게 된다.” 라고 설명했다. 즉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많은 투자를 받는다면 그 질을 제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회의 평등’을 통해 투자를 비슷한 수준으로 제한함으로써 철저히 ‘투자 대비 수익률’만 비교하면 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미국과 싱가포르의 교육관료들을 비롯해 여러 능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인데...이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며 그 효용이 어떤지는 다음 글에서 마저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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