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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34)

힘든 에너지는 차단하기

6-4. 오늘 사랑할 수 없는 에너지는 차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착함은 악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는 착함, 원칙이 없는 관용은 진실된 선함을 무너뜨리는 무지입니다. 착하다 보니 타인의 말에 쉽게 동조하고 이용을 당하고 후회하는 사람을 잘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중심이 무너져 비어버렸기 때문에 외부 에너지에 삶을 맡기는 경우입니다. 어릴 때 부모가 자유롭게 결정하고 노력하고 성취하는 기쁨을 길러주는 대신 작은 것도 잔소리로 가르치고 가스라이팅 하듯이 자랐다면 오늘의 내 모습은 타인의 가치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 제로인데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면 반드시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다는 동기가 숨겨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이타적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 거짓된 태도가 드러나고 상대에게도 성장이 아닌 독이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내면의 욕망과 소리 그리고 판단력에 귀 기울이는 연습과 훈련이 없다면 후회 가득한 삶이 펼쳐질 것은 분명하지요. 왜냐하면 내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에 억압이 계속되면 충동장애나 공황 같은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 가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의식은 깨어나기 어렵습니다. 내 참나는 어떤 감정이나 상처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나, 마음이 억압되고 비참함에 빠져있으면 숨어버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느 정도는 선하고 어느 정도는 악한 것이지 절대의 착함만 있거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문화에서 법과 질서가 다르듯이 개체로써 인간의 선악 기준도 몹시 다릅니다. 

우리는 착한 신성 때문에 억울함과 배신의 고통을 맛보기도 합니다. 선함이 이 사회에서는 힘을 잃고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착한 마음일수록 따스한 감성과 결합을 원하고 거기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착함을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나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자신의 착함을 위해 방어하는 방법도 필요합니다. 이 사회의 구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 않으며 모두 부자가 될 수도 없고, 착한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착함은 양심의 내면 소리에 따라 사는 훈련이 되어 있을 때 흔들리지 않으며 원칙을 갖고 불편하고 힘든 상황들을 극복할 방법을 생각하며 방향을 잡아야 살아납니다. 이때의 원칙 중 하나가 폭력적이고 비난과 경멸 등의 악한 에너지들에 깨어서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심리적, 경제적 홀로서기 속에서 성장합니다. 부모나 자식 즉 가족과 지인들이 부정적일 때, 내 사랑의 능력이 작을 때는 합리적 이유와 설명으로 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좋습니다. 왜냐햐면 서로 부정적 감정을 계속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그들도 행복과 사랑을 발견하는 길을 막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절의 이유와 솔직한 의견을 부드럽게 사랑을 담아 진실되게 이야기 한다면 좋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게라도 자신의 불행을 전염시키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생각 없이 주변에 불행 에너지를 뿌리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인과의 법칙대로 결국은 뿌린 사람에게 돌아가 더욱 불행의 마음을 키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엔, 그들의 에너지를 차단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은 항상 스트레스를 내보낼 사람을 찾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의 스트레스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동일시라고 하는데 타인의 불행에 전염될 때, 그 불행한 마음이 내 것이 아님을 깨우쳐 산책이나 수면 혹은 각자의 즐거운 방식으로 들어와 나를 무겁게 하는 그 마음을 내버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불행한 에너지가 나에게 오면 내 안에 불안함과 상대의 불행한 파동과 조응하는 내 마음이 반응을 하여 그 마음을 내 것과 일치시키는 동일시를 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어 마음의 성찰이 생길 때까지 서로 기다려주는 것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그 시간에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극복하려는 자각 에너지는 충분히 모여야 힘으로 작용하는데 반복해서 잔소리처럼 적당히 섞이면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적당히 섞여야 한다면 호흡에 집중하거나 경험적으로 평온함을 주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자신으로 돌아와 그의 에너지가 나의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사라집니다. 인간은 본래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의 본성을 지녔기에 의식의 표면에 내 것이 아니므로 사라진다고 각인하면 쉽게 빠져나갑니다. 자기 사랑의 기초는 바로 부정적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해 보는 것이고, 내면의 사랑의 느낌을 보전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내 안의 사랑 느낌을 키워주고 보전해 줍니다. 


 자신을 위해 ‘나는 어떤 것이 나의 사랑을 자극하는가?’ 관심을 갖는다면 자기 사랑을 회복하는 첫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힘든 에너지가 입력되었을 때는 내보내는 호흡을 강하게 반복하며 산책 등으로 머리를 비웁니다. 스스로 부정적인 마음이 찾아올 때는 호흡에 집중하고 잊고 있는 내 안의 사랑 느낌을 느껴봅니다. 만트라를 만들어 힘든 마음일 때 반복해서 자신을 위로해 어두운 마음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게 관리하거나, 부정적인 에너지에 휩쓸려 그 마음이 내가 되어버린 경우에는 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운동 등으로 환기합니다. 잠들기 전에 자신을 사랑하는 가슴으로 안아줍니다. 진리의 글이나 말을 듣거나 새기며 지성의 힘을 키우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은 태어나 3세까지는 ‘참나’ 의 상태로 순수합니다. 즉 순수한 입력체로 태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전생의 영향과 타고난 경향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환경을 흡수할 준비를 해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전생의 경험적 기질을 제외하고는 비어 있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참나’는 텅 비어 있으되 가득한 에너지체이며 본성의 느낌은 사랑이기 때문에 만물과 조응할 준비된 자유정신이 바탕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상태는 이렇게 ‘참나’의 원형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 삶 자체는 고행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모든 부정적 에너지를 상대해 나 홀로 서는 것이 쉽지 않으며 이것이 실제로 수행입니다. 따로 고행이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자체가 고행이기에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홀로 이 고생을 잘 감당해 내면의 힘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수행입니다. 조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르시스트처럼 자기 세계에만 몰두 된 편협한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마음 이전의 우리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두시간에 잠깐이라도 지금 여기의 존재로 돌아가면 중심을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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