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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41)

조화롭고 평온한 삶의 전개

7-2-5. 5단계, 내가 무엇이든 조화롭게 살아갑니다.

 5단계는 의식의 역할이 몸과 마음에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변화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일상의 활동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몸과 하나가 되어 행위 그 자체에서 일치감과 존재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생각은 필요할 때 집중해서 하고 가볍게 생각을 행동으로 바로 옮기지만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선 접어두고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하나가 되어 내가 여자인가 남자인가보다는 인간이란 통합된 느낌이 더 강화됩니다. 남성은 좀 더 수용적이 되며 여성은 좀 더 두려움이나 의존성이 줄고 자유로워집니다. 전체적으로는 주어진 환경과 나를 더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성격이 변하지만 결단력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그동안 필요에 의해 선택된 남성, 여성이란 몸을 관장하던 두 가지 성향의 에너지가 하나로 통합된 것입니다. 좌우의 파갈라와 이다가 통합되어 수슘나의 차원이 열려 내면과 외면, 나와 너, 남성과 여성, 음과 양의 합일되어 하나가 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헤매던 마음이 내면의 집으로 돌아왔기에 평화롭고,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의식의 힘이 자라 작은 일에는 흔들리지 않으며 그 의식이 확장되어 인간 본성인 신성이 깨어나 몸과 마음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과일이 익듯이 각각의 인격에 향기가 살아납니다. 오쇼의 지성과 마하리쉬의 침묵, 파탄잘리의 명쾌함, 라마 크리슈나의 비어있음 등의 특징은 깨어남의 향기와 과육의 다양함을 의미합니다. 이때 혹자는 제자를 가르치거나 조용히 살며 타인을 돕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아직 스승의 인가나 주변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다면 과일이 덜 익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를 자랑한다면 의식이 아니라 나라는 마음이 주인인 것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지며 오히려 노력은 자연스런 열림을 방해하는 인위적인 것이 됩니다. 

 본래 성품이 밝고 유쾌한 것을 회복하여 전체적으로 웃음이 늘고, 생각의 습관은 남아 있으나 혼자 있을 때는 평화 속에 비어있는 시간이 많고 누군가와 만나면 거울처럼 비춰주게 됩니다. 거울은 상대가 와서 비출 때만 역할을 하고 가버리면 더 이상 비출게 없는 것처럼 마음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능력이 자라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문득 어떤 문제가 해결될 때 이 차원이 활성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삶의 길과 사랑의 길을 숙지하고 실천했다면 깨어남의 깊이와 넓이가 풍부하고 오직 ‘앎’만 존재하기도 합니다. 지식은 사라져 무식해 보일 수도 있고 단순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알기에 부정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집착할 만한 무엇이 아니고 텅 비어 있으나 동시에 이 모든 만물은 필요한 것이며 완전하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으로 걸림 없이 삶을 즐기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자신도 일상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순간이 없지 않지만 다만 모를 뿐입니다. 번뜩이는 지혜가 튀어나오고 가슴이 환해지는 경험들을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눈을 감고 명상적이 될 때, 강렬한 태양이 아니라 달빛처럼 은은한 지속감으로 표현됩니다. 의식의 깨어남은 대단한 체험과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착각은 오래전의 낡은 고정관념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때부터는 과거의 나와 지나간 과정이 확연히 구분지어 집니다. 소통이 활발해지고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창조작업은 계속됩니다. 사람에 따라 비슈다 챠크라의 특성인 목소리를 내는 경향도 증대되어, 설법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물론 이때는 에고의 이기심이 없기에 타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순수하게 노력할 수 있습니다. 순수 본성을 회복했기 때문에 만물의 평등함을 존중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진정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 남과 나를 미워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수용하며 살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니 먹을 때는 먹고, 잘 때는 자며 평화로움 속에 주로 머물게 됩니다. 곽암의 십우도에서는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휴식하는 때입니다. 그러다 보니 활동적인 에고의 눈으로 보면, 에너지가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 혹은 부와 명예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는 하루하루를 감사와 사랑의 느낌으로 사는 경향이 많습니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나누며,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기 때문에 현 상황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 그대로임을 인지합니다. 


 뇌의 파동이 변해 수면을 아주 적게 하여도 피곤함을 모르기도 하고 깊은 숙면이나 예지몽을 꾸는 일도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 있어도 내면으로 들어가 텅빈 홀로 있음에 자주 머물기도 하지만 전체 에너지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육체 에너지가 약하게 태어난 사람은 절대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우주의식과 쁘라나라고 하는 우주에너지와 결합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대체로 폐쇄된 공간이나 탁한 에너지가 가득한 곳을 선호하지는 않으며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는 것은 몸이 민감하게 우주의식과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의식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마하리쉬의 제자인 ‘마음은 없다’의 저자 슈리 안나말라이는 하루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육체 에너지가 적어 산속에서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만공의 제자 중에 수월스님은 만주의 산속에서 오가는 사람들 배고픔을 달래주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대중과의 접촉보다는 이름을 남길 이유가 없이 조용히 살다 간 아라한적인 각자들도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깨달음 이후에 조용히 사는 경향이 더 많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참 나’가 드러나 무위자연하지만 여여하게 평화로움 속에서 일상을 살아 가게 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로의 진입을 확신할 수 있는 징표는 흔들리지 않는 의식이 내 안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답할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모를 것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자유의 개념이 삶의 중심이 되어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락하니 마음으로 느끼는 기쁨이나 행복감 등에 집중하려는 노력도 사라집니다. 한편 마음의 깊은 트라우마는 사라지지만 까르마적으로 전생부터 각인된 것들은 작은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일들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때로는 어려운 일들이 오긴 하지만 그것의 고통은 작게 지나가고, 생각한 것을 쉽게 이루는 경향이 증대됩니다.


 사실 오랫동안 대중에게 확산되었던 ‘시크릿’ 즉 ‘부를 이루는 비밀’ 등 한때 열풍이었던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프레임은 이 차원에서 힘을 사용할 때 쉽게 현실화됩니다. 그러므로 낮은 마음의 상태에서 에고적 욕망으로 소원을 빈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에너지가 순일해져서 의식의 에너지와 결합될 때 소원의 물질화가 이루어지곤 합니다. 잡다한 이기심으로 기도한다고 모두 이루어지면 우주의 평화로운 조화는 엉망진창이 될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삶은 놀이와 잔치가 되며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 육체는 자연치유능력도 높아집니다. 



7-2-6. 6단계, 다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며 내면 안에서 세상의 영향을 넘어서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살게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품성과 생각 없는 상태로 지내다 보니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름다움이 존재로부터 솟아 나오고 보통의 사람들 보다 육체의 진동수가 높아 침묵하고 있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나라고 하는 에고의 형태가 흐려져 물처럼 흐르는 경향 즉 수용성이 놀랍도록 커집니다. 옳고 그름이 없기에 실수와 범죄자에 대해서도 평등한 사랑을 보내고 순간순간 존재 안의 신성에 마음을 연 예민한 사람들에게 의식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주와 존재계 전체의 법칙을 알기에 그 법칙과 함께 먹고 자고 말하므로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합니다. 스스로의 변화를 기뻐하지만, 나는 깨달았다거나 위대하다는 등의 규정이나 생각도 대상이기 때문에 하지 않게 됩니다. 행위하지만 행위로부터 자유로우며, 순수한 지켜봄으로 의식이 의식으로 회귀하여 나라는 에고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5단계에서 6단계로 깨어나는 과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제3의 눈 즉 양미간 사이에 에너지가 모이며 눈을 감으면 보름달이 환하게 뜬 것처럼 내면의 신성의 빛을 늘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전에 호흡이나 명상에 집중할 때 자신도 모르게 제3의 눈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단순히 들숨 날숨에 집중하는 것 만이 아니라 다양한 호흡법을 통해 에너지를 일깨우고 가슴이나 제3의 눈을 의식적으로 일깨우는 명상법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매 단계는 층계를 오르듯이 딱딱 구분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리뭉실 섞여 있어 혼란스럽기도 하므로 각 단계의 특징들을 알아 혼란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스스로의 길과 방향을 자존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만의 길입니다.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서 단정적으로 너는 4단계이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의외로 사하스라 챠크라가 열려 있는 사람이 모르면서 그냥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하스라 챠크라가 활성화될 때는 머리 위에 에너지가 모이는 것을 느끼다가 빛의 강렬한 체험을 하거나 우주와 합일되는 텅 빈 공의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기도 하고 자신이 아주 거대해져서 우주가 되거나 먼지처럼 사라지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지극한 평온함을 내면의 신성 안에서 느끼게 되는 등 체험은 주관적이며 천차만별이기에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이 차원도 몸과 마음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험하면 큰 의미가 없으며 품성이 준비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체험은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희미해지고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냥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의 깨어나는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느끼던 순수의 마음은 나이를 먹어도 내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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