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으로 사는 연습하기
( 지금 여기에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그냥 살면 됩니다.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의식을 일깨우는 길은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며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잡한 모든 방법을 꿰뚫어 보면 의외로 간단한 길이 있습니다. 더 많이 웃고 즐길 일들을 창조하며 사는 것입니다.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지금 여기서 ‘참나’를 신뢰하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삶을 수용하며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조건과 환경을 따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아기처럼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내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와 아집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감사와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 에너지를 진리에 열고 참된 나의 상태를 이해하는 만큼 그렇게 방향을 잡고 준비된 만큼씩 살면 그렇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내 모습을 인정하고 한발씩 나아가며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고 성취해 지금 여기의 소중함 속으로 회귀하는 훈련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깨달은 사람은 외형적으로 특별한 것도, 생활 방식이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온갖 수행과 금욕생활을 하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은둔해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즐기고 생명을 사랑하며 원하는 데로 사는 경향이 증대됩니다.
마하리쉬, 노자, 오쇼, 마하라지, 파파지, 죠셉 머피,죠셉배어 마이클 싱어, 에크하르트 톨레, 팃낫한, 라마크리슈나, 요가난다, 크리슈나무르티, 세인트저메인, 그리고 한국의 몇몇 등 깨달음을 선언한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인구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천차만별인 개인의 삶처럼 깨달은 사람도 각각의 향기와 가르침을 펼치고 있습니다.
의식의 깨어남에 대한 설명이 다르고, 강조하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은 그가 걸어온 방편이 다르고 깨어남의 깊이도 다르기 때문이며, 에고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설명한 대로 참나를 알아가는 길은 일정한 법칙을 갖고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은 달라 보이지만 깨어나는 길은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되어있습니다.
각각의 깨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의 과정과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을 네비로 검색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간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갈 것인지 수많은 선택 가능한 길이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안다면 길을 잃어도 다시 찾아가기 수월할 것입니다. 이 우주는 완벽한 규칙과 조화로움 속에서 오늘도 해가 뜨고 지구가 돌 듯이 명확한 법칙이 있습니다.
변함없는 행복과 평화는 사라진 적이 없고 삶의 전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늘 우리와 함께 합니다. 이 순수함으로 자신을 돌려놓을 수만 있어도 평화로움 본성 안에 머루는 시간이 늘어나 고통이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사실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완성의 목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인 것 뿐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편을 전 생애를 걸쳐 자유롭게 시도하다 보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의식의 나이도 자란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의식의 입장에서 보면 삶은 누리고 즐길 만한 것입니다. 욕망을 성취하고 비워갈수록 비워진 곳으로 사랑과 평화와 평등과 만족감의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평화로운 조화 안에서 생성, 소멸, 재창조되고 있는 우주의 일부입니다.
하나인 에너지로 몸과 마음이 의식과 통합된 자아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창조되고 있기에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내 마음이 뿌리고 있는 씨앗이 무엇인지 알고 깊은 호흡에 집중할 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소리를 듣고,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상태 그대로 평화의 느낌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멍하게 있으나 자각하고 현재를 느끼면 그것이 평화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주인이 되면 걱정과 갈등의 마음이 작아지고 일상에서도 인간 본성인 평화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슴에 평화의 느낌을 키워 평화를 사랑하며 전체화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공격성과 이중적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참되게 살아도 몸이 아프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마음에서 그것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곧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동요되기보다는 살아있는 몸과 마음이 해결하거나 처리할 일들을 통해 배웁니다. 불안과 고통이 찾아오면 침묵하며 전체 우주가 그것을 정돈하여 본성인 평화로 회귀할 때까지 지켜봅니다.
무심하게 지켜보며 마음으로 지지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주의 평화로움이 상황을 해결하고 관여된 상황을 정돈해 줍니다. 깨어남의 정도가 아직 부족하여, 무심이나 고요함을 삶에서 구현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긍정의 기도와 만트라로 파괴와 갈등의 에너지를 녹여내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나보다 위대한 전체, 혹은 신성 혹은 불성의 조화로운 우주가 일으킨 문제이므로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습득하고 모든 문제를 전체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증오나 실망 한탄 등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힘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르고 있는가입니다. 의식이 깨어난 사람은 에고의 욕망과 거친 마음 때문에 작용을 할수록 반작용이 거세져 문제가 문제를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면 깊은 곳의 의식 안에 숨 쉬고 있는 평화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신뢰하기에 하루하루 주어진 것을 수용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나 고통을 반기며, 아직 배우고 깨우쳐야 할 것을 존재계가 알려주는 상징으로 알고 빠르고 간단하게 수용하고 넘어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자라면 문제나 고통이 평화의 에너지에 녹여져 찾아오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