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부작용 -무의미에 빠짐
명상을 했다고 무당 체질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가슴챠크라가 활성화되었으나 삶이 행복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면 일시적으로 이명과 환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본래 타고난 무당 체질은 유전적 까르마적인 강한 이유가 있고 빙의가 잘되는 무당 체질은 인류의 역사 속에 늘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마음공부를 해서 의식의 힘으로 치유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무당 체질은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의 에너지는 여러 차원의 수준과 질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수준과 질이 어떠한지에 따라 만나는 접점이 달라집니다. 나도 근원 에너지의 일부이며 마음의 파동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비워진 에고의 순간에 전체 우주와 사랑의 신에게 집중하고, 잡다한 에너지체들이 가까이 오지 않게 마음을 아주 밝은 빛 쪽으로 향해 가면 성장의 기회로 바뀝니다. 에너지체는 모두 한이 많은 낮은 차원의 에너지체이고 인간을 이롭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생길 때 방향을 잡아주는 스승이 필요할 때입니다. 집안에 무당이 있거나, 어려서부터 심령체를 본 사람은 제대로 수행을 하여 마음을 사랑과 지성으로 준비하여 비슈다체 즉 해탈체로 성장하는 다리로 이용하도록 합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명확하게 ‘아는 것’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으나, 영원한 앎은 아니며 모든 안다는 것은 단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로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이 모인 것이며, 깨달아 총체적으로 ’앎‘에 도달한 것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확연한 깨우침은 오히려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도 내 존재는 성장한다는 것을 알 때 찾아옵니다.
하나하나 익혀가고 이해했던 내용들이 모여서 임계점이 되어야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이 99도가 될 때까지는 수증기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의 사랑, 평등, 자유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의식 나이의 성장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인격에 배움이 내면화 되어 삶으로 드러나기 까지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참 나가 온전히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급한 욕망이 스스로를 더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식의 실체는 ’참나‘를 가리는 경향도 많으므로, 실제로 삶으로 드러나기까지 구체적인 노력과 중심을 잡고 삶 그 자체를 즐기는 실력이 자라도록 에너지와 관심을 주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행복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그 자체가 의식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방해요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 번에 변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실체로 지금 여기에서 변화로 드러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고 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질서와 내면의 메카니즘의 변화가 지성과 사랑의 힘으로 강고해지기 전까지는 갈등과 혼란이 흔히 나타납니다. 외부생활도 잠시 어렵거나 실패의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명상을 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시기이기 때문이므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능한 받아들이고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이 거부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작은 나를 확장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의 속성 때문에 반복되는 관리되지 않는 상황들로 더욱 부정적 감정이 잘 느껴집니다.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눌러 놓았던 것들이 튀어나오며 갈아 끼는 과정에서 욕망에 더욱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반복해서 같은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며. 완전한 극복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넘어진 돌에 계속 넘어져 피가 나는 현상을 반복하는 자신과 만나게 합니다. 이는 우주가 그러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완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진한 마음은 반복해서 문제 속으로 나자신이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은 즐거운 생명의 속삭임이기도 하지만 수행을 하는 고행이기도 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이며 이 순간 우린 이미 선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작고 쓸모없는 이유로 부부싸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많은 의문은 제대로 살면 나이를 먹을수록 정리가 됩니다. 덧없는 사고작용이 줄고 현실화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통찰력도 생기고 필요 이상의 욕망 때문에 스스로에게 함부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변화가 생깁니다. 삶은 여전히 흘러가고 내가 엄청난 의도적인 노력을 하는가 아닌가와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데 문제가 없기도 합니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한 덕에 마음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타인들과도 무리 없이 잘 지내는 방법도 알며 살아갑니다. 몸과 마음과 의식이 적당히 균형과 조화를 이루니 큰 문제는 없고 괴롭거나 힘든 일도 동일시하지 않고 처리해 갑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예전에 열광하던 에고는 약해지고 공에 빠지면 사는 게 덧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의미를 부여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체험이 부족하고 대신할 긍정 마음으로 전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본성이 마음 만이 아니라 의식임을 보았기에 견성을 한 것 같으나 확철대오가 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증상입니다.
인간은 생존 욕구가 있는 만큼 사라지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으면 귀찮아지고 미련이나 집착을 거두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오쇼 아쉬람의 제자 중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과정 중에 즐거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삶이 예전만큼 유의미하지 않으니 죽음의 충동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즉 참나는 죽지 않으며 몸이 바뀔 뿐이라 믿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의 체험을 해보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은 아직 충분히 의식이 발현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수용하는 평화의 길이 열리지 않은 것일 뿐이며 과거의 영향에서 다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함이나 공에 빠지는 낙공현상은 이중적인 마음의 장난입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마음입니다.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의 생명에 대한 하나된 마음을 알고, 감사와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면 깨달았다거나 견성했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무의미함으로 무력해지고 오랫동안 우울하다면 공에 떨어진 것입니다. 본성이 공하니 준비가 덜 되었는데 욕망으로 명상을 심하게 밀고 나가면, 공한 상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몸 안의 부정적 에너지와 노폐물들이 순일하게 열리지 않은 통로로 몰리면서, 병이 되는 것처럼 가혹한 수행 또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깨어날수록 삶이 기적처럼 변할 것을 기대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본성이 공하니 공에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있느냐? 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낙공은 공에 지배를 당한 것으로 심리적으로는 심한 무력감과 허무감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분들 중에 많은 경우 쉽게 빠지는 마음 상태로 진정한 공 체험과는 다릅니다. 마치 피곤에 지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평생 하다 보면 무력감, 허무감과 만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낙공은 이 허무감의 강도가 세고 전체적이라 위험합니다. 전생과 연결되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인격도 있으며 이 경우에는 일상으로 돌아와 공함을 힘으로 바꾸어 긍정하며, 즐겁게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습니다. 핑계와 이유를 달고 있는 그대로 행복한 나를 부정하는 마음을 이겨낼 때 의식이 깨어납니다. 아주 작은 것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습니다.
따스한 느낌의 현실감을 찾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연습을 빠르게 하여 중심을 잡고 다시 도전하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