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삼만 팔천가지 법문을 설한 것은 중생들의 마음 구조와 처한 상황 그리고 깨어난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보면 그의 설법이 모순된다고 충분히 오해할 만하기도 합니다. 말로 표현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듯이 말은 그때 그 순간에 타인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과 행동은 규칙적인 고정된 틀을 갖지 않습니다. 자신이 우주를 만드는 주인으로 자리잡기 때문에 선악이나 사회적 규범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니 본래 의식인 자유로움 안에서 말은 방편일 뿐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있다는 것은 아직 그 마음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보면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대부분 그 사람이 걸려 있는 생각으로부터 선택된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도구로써 내가 활용하고 사용한 다음에는 내려놓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행동으로 드러날 때 그 말은 힘을 갖게 되어 실체화되니 말과 행동에는 믿음을 수반할 때 힘이 있습니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잡생각들이 적어, 의식이 깨어날수록 침묵과 평화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택하고 행동한 것은 전체 우주의 결정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가슴으로 느껴진 것을 실천합니다. 우주의 결정과 내가 하나가 된 행동의 결과는 선하며 대부분 성공하지만 내가 만든 우주와 불일치되는 행동은 즉시 성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배움을 위해 남겨 놓아 지고 반복을 통해 완성에 이르게 하는 우주의 의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일치되지 않은 갈등구조에서 태어난 행위는 다시 갈등을 만들곤 합니다. 이것을 알기에 말은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하고, 행동은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행하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만든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서 허락되어 분열된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행하니 내면에서는 일관되어 우주가 허락하지 않은 행동이나 억지를 부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기존의 관념과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워 집착하고 있던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에서 여유가 생깁니다. 전체 의식과 함께 하니 변화와 창조를 환영합니다. 물론 그러다보니 평범한 에고를 지닌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관성이 없게 느껴지고 변덕스럽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공부가 깊어져 참나의 상태로 오래 머물게 되면, 실제로 이런 감정적 느낌이 사라지고, 또한 감정적 상태를 지향하지 않으니 은은한 평화와 무심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타고난 육체 에너지가 작거나 예민하여 은둔하며 조용히 살다 간 성인들도 많습니다. 제자를 많이 양성하지 않고 스스로 깨우침에 만족하며 사라진 선각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보다 많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 후에는 순간순간 내면으로 돌아가 있는 그대로 존재로 머물러 주변의 소란스런 에너지들을 버리고 더 깊은 평화로 돌아가 휴식하곤 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곧 사라지게 되어있다.’는 진리를 숙고해 보면 남의 에너지를 붙잡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 소비를 덜하고 순응하며 사는 노인의 얼굴에 이런 깨달음이 있습니다. 자연의 일부로 어린아이처럼 웃는 얼굴을 가진 농부에게도 깨달음의 조각들이 묻어납니다. 거창하게 깨달은 스승이 아니어도 하루 하루 편안하게 휴식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노자의 표현대로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존재가 하나인 상태이므로 주로 지복감을 느끼는 경향은 동일하지만 체험을 생각이나 느낌으로 단어화해야 하기에 다양하며 단정적일 수는 없습니다. 행복감은 참나의 목표가 아니며 부산물일 뿐입니다. 아주 행복한 느낌으로 깨달음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으나 묵직한 공으로 표현하는 경지도 있고, 유머와 재치가 있거나 아주 진지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인간으로서 이룰 것은 다 이루었다’고 느끼며 살기에 진정한 휴식 속에 산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마하리쉬는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운명론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깨어날수록 한가지 사건은 나와 우주가 함께 창조한 것으로 운명과 자유의지는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진리를 수용하는 길은 주어진 내 삶의 수용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하리쉬의 말은 수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걱정할 무엇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신뢰하는 사랑의 마음은 사람의 수용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이므로 하지 말라,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적습니다. 만약 ‘안된다. 하지 말라.’는 주장을 많이 하는 깨달은 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방식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궁극의 자유를 신뢰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주 의식이 낮은 사람이라면 이런 가르침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의식이 깨어날수록 스스로 자유를 향해 가며 스스로를 홀로 책임있게 가꾸게 돕습니다. 실패의 길도 스스로 선택하고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무엇이 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는 것도 지켜보며 스스로 일어나도록 도울 뿐 개인의 현상적인 삶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일들은 본인의 신성이 선택한 것이니 겪고 깨우치는 지혜를 스스로 체득할 때 자신의 스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답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인위적인 강한 외부의 힘으로 변화를 요구해 설령 변했다 해도 이것은 제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의 가르침에 따를 때 쉽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알기에 현재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에 눈을 뜨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내면의 신성이 깨어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스승이 되어야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깨어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 그리고 지성으로 까르마를 재생산하지 않는 지혜로운 수용을 일상에서도 구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삼매는 늘 내면에 존재하므로 에고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개성의 기본 틀은 깨달아 가면서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깨달았다 해도 몸과 마음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닌 것이지 그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순수한 욕망은 즐거움을 누리는 기회로 활용합니다. 마음의 습관적 경향은 남아 있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존재합니다. 다만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변화를 인정하고 전체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두려움보다 신뢰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도 하고 배가 아프면 뱉어내고, 싫으면 울거나 떼를 씁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새로운 자극을 반기고 삶을 놀이로 신나게 즐깁니다. 참나는 이렇게 순수한 어린이와도 닮아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순수이기에 깨어날수록 어린이와 같아집니다. 다른 점은 의식이 깨어 그것을 바라보고 알고 있기에 더 깊게 느끼고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순수는 무력하여 쉽게 잃어버리지만, 의식적인 순수는 집으로 돌아와 우리를 행복하게 머물게 합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은 사람을 기뻐하며 아이처럼 감응하는 등 순수한 가슴이 열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라마크리슈나는 부인이 하는 음식을 몹시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부엌에서 음식을 할 때마다 옆에 서 있으니, 제자가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하니까 세상에 머물려면 끈이 있어야 하며 그 끈이 부인의 음식이라 설명하면서 내가 부인의 음식에 관심이 멀어지면 6개월 후에 죽을 것임을 예고했다는 일화는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