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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 (53)

허무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요 (3)

질문

좀 어떠신지요?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잠시 나로 돌아와 '난 괜찮아. 내 본성은 늘 존재하고 평화로워' 하는 마음으로 머물곤 합니다. 일일이 지적하고 화도 내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이렇게 잔소리 많은 상사였다는 것, 그래서 부하직원들이 멀리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저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더라구요. 제 아버지의 모습이 저에게서 그대로 보여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싫어하고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 모습이 되다니.     

질문

그래서 실망하셨습니까?      

지금까지 명상한다고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와서 힘들었습니다.     

질문

아 자괴감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자학적인 판단을 당신이 허락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그냥 보는 연습을 해봅시다. ’그렇게 살아왔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에 감사하는 편이 백배 훌륭한 자아성찰의 태도입니다. 좀 더 탐구하고 싶다면 오히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의 기본 원리를 적용해 ’내가 왜 그런가?‘ 하고 탐구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따스하게 넘어 가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참된 자아가 원하는 태도이며 진리에 가까운 마음입니다. 우린 진리 따로, 삶 따로, 마음 따로, 행동 따로 늘 널어놓고 스스로 분석해서 명쾌하게 정리해내지 못하고 마음 안에 다양한 쓰레기를 쌓아놓고 살고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진리 안에서 늘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거야말로 비과학적이고 기적을 바라는 마음 아닙니까?      

그러고보니 제가 과거에 형성된 감정을 늘 현재로 끌고 와 동일시하며 답답하고 길이 없다고 한 듯 싶습니다.     

질문

바로 그렇습니다. 오히려 이 삶으로 긍정적인 나의 본성을 끌고 와 현재화하는 것이 자유를 향해가는 수행입니다. 이 삶을 떠나 깨달음이란 무의미한 것이고 우린 삶이 행복해지는 것을 모두 원하지 않습니까? 깨달음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 속지 마시고 실제로 변화해가야 합니다. 궁극에 더 많은 순간에 나의 참된 자아에 안주하여 평화롭고 고통이 와도 다룰 줄 아는 지혜를 믿고 헤쳐갈 수 있기에 고통은 배움이 되어 쉽게 지나갈 것입니다. 어떻게 아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걸림이 있다면 문제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알고 이해하는 기회인 것이고.      

그렇다면 이 허무감도 무언가를 배울 기회인 것 같습니다. 조금은 제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살짝 가벼워진 느낌도 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제가 좀 편해지니까 마음을 열며 다가와 주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질문

 우선 매사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받아들일 때 지름길이 열리곤 합니다. 빨리 배우고 지나가게 하지요. 그리고 삶의 과정을 고통에 찬 금욕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식의 강박으로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충분히 받아들이고 즐기십시오. 주어진 것들을.

당신이 만약에 직장과 가족을 버리는 수행의 길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가족의 비난과 노후의 불안정함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하기 쉬운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길이 길입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당신은 그동안의 노동으로 노후는 안정되어 보입니다. 오히려 은퇴 이후 홀가분하게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필요한 스승을 만나 깊은 성취를 맛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갈등을 인내하며 스스로 배운 것도 있습니다. 가족을 버리지 않고 지켜낸 것과 마음 밭에 씨도 뿌리지 않고 무작정 수행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생겼습니다. 지루하고 갑갑해도 잘 해온 것이란 생각이 조금 듭니다.     

질문

 맞습니다. 신이 있다면 사랑할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항상 적재적소에 깨우칠 기회를 선물합니다. 저 역시 저의 내면의 소리에 따라 소박하지만 걸어올 수 있어서 지금은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 사랑과 영혼의 자유를 깨달은 스승이 당신 곁에 있다면 좋았겠지만 결국 과일이 익어갈 때는 스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성장합니다. 지금은 제대로 된 스승이 별로 없으니 스스로 길을 내 안에서 찾아야 하지요. 그런 자존적 태도는 예민하고 미묘한 느낌의 지성이 필요하지만 빠르게 참 나 안에서 즐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견성 체험이 현재로 회복되며 그 고요와 평화에 대한 의심이 좀 거두어졌는가요?      

제 경험이란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책을 찾아보니 그렇게 내세울 만한 깊은 체험이 아니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매일 다시 시작한다 생각하며 일상에서도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 감사함을 느끼며 살고자 합니다. 한가지 변한 것은 한탄하는 마음이 호흡과 긍정 만트라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 어둠이 걷히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면 악몽을 꾸는 대신 잔잔하게 그동안 억눌렀던 장면이 연출되면 지켜보거나 화를 내기도 합니다. 꿈 속에서 못해본 것을 풀어내는 기분입니다.     

질문

 좋습니다. 사실 당신 나이에 취미도 없고 고지식한 분이 내면의 응어리진 에너지를 내보낼 대상이 별로 없습니다. 악몽을 꾸면 반겨주고, 꿈속에서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심 차차 꿈 안에서 지켜보는 자로 남거나, 억압된 마음이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꿈의 발전은 의식의 성장과 연결되어 있어 대체로 이 과정을 거치곤 합니다. 꿈은 숨겨진 당신의 마음이고, 작은 에고에서 자유로워지면 우주의식과 만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쯤이면 당신의 가슴 챠크라가 활성화될 것 같기도 한데 좀 예민해지지 않나요?     



녜, 좀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직원들을 보면 상태를 알 것 같더군요. 마음이 느껴지니까 제가 긴장을 풀게 웃어 주기도 하고, 힘들어 보이면 격려의 말도 해주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이 이제 저와 눈도 마주치고 가벼운 목례를 할 때 진심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가장으로 짐스러웠던 마음이 좀 누그러져 가족 간에도 무거운 공기가 살짝 열리며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제 딸이 최근에 저에게 말도 걸고 웃어주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에도 딸은 제 주변을 맴돌며 웃기도 했었던 것을 제가 보지 못하고 무시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처음으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질문

 실재로 당신이 원하는 깨달음이 무엇이며 당신은 어떤 기준이 있습니까? 적어도 여러 노력을 하셨으니까 당신 만은 스스로의 성장을 믿을 수 있는 기준은 세워놓아야 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예지능력, 채널링, 유체이탈, 독심술과 같은 것이 생기길 기대하며 수행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성장이라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말한 대로 제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마음에 휘둘리며 살기는 지겹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까요?     

질문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욕망을 다룰 줄 아는 데서 나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에 집중하여 즐겁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절대의 자유의 느낌은 홀로 깊은 내면에 침잠되어 있는 순간에 맛볼 수 있는 것이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노력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하나로 존재할 때 느낌입니다. 

그러나 절대의 자유 안에서 늘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즉 마음과 욕망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생존욕도 욕망이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혹자들은 신이 된다는 것을 중세적 신학관의 프레임에 갖혀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씨크릿'이란 책들에 많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럼 씨크릿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나의 욕망이 성취되길 바라고 신에게 기대하지 않습니까?      

질문

제 경험을 말씀드릴게요. 집 앞 가로수 사이로 어느 날 감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감나무가 벗 나무에 가려 햇빛이 안 드는 것에 마음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톱도 없고 웅장한 벗나무를 자를 의욕은 없었죠. 일주일 후에 톱질 소리에 나고, 구청에서 가로등을 고치러 왔다가 벗나무가 빛을 가리고 있어 가지를 쳐 주더군요. 어느 날 문득 식욕이 없어 닭 튀김을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1분도 안 돼서 멀리 사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노크를 하셨습니다. 반갑게 만나보니 그녀의 손에 닭튀김이 선물로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주 많습니다. 

물질은 다양한 방식으로 내 손에 들어옵니다. 깨달은 자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더 많은 욕망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만족하는 생활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비워갈수록 주어진 모든 것들이 씨크릿의 이치처럼 신비함과 감사로 연결됩니다. 주어진 만큼 우주가 허락한 것을 알기에, 우주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구함이 없어도 주어진 것이 씨크릿입니다. 저는 10억이란 돈을 일념으로 기도할 마음이 없어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진심으로 모아지는 것이 미래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제 소원을 성취하며 살아왔죠. 문제는 진심으로 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믿음이죠. 온 존재가 바라는 것이 진실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까르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식이 깨어나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울수록 과욕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소원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구체적이고 명확한 한 가지 소원이 있나요? 삶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명확한 소원이 무위의 흐름에서 성취되면 그 후에는 또 다른 소원을 만들고 흘러가는 것이 삶이기도 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 

 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질문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소원을 이룬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당신은 충분히 깨어난 것이 아닙니다.      

..........     

질문

깨어날수록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당신은 가진 것이 많은데 

가난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편의점 알바생 보다도 행복감이 멀리 있군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     

질문

오늘은 여기까지. 숙고하고 지성의 통찰력으로 습관적인 생각을 성찰해 수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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