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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 (52)

허무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요 (2)

질문

 삶은 흐름이고 살아있는 신비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을 한다면 각자 다르고 그 또한 변화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곽암의 십우도에서 혹은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혹은 붓다의 화엄경에서 보여주는 깨어남의 과정은 아주 명확한 기준과 객관적인 이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하는 나는 주관적이며 깨달음은 끝이 없습니다. 저에게 10년 전의 답이 이것이었다면 5년 전에 답은 저것이었고 지금은 또 다른 답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질문

깨달음이니 명상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권의 책만 보아도 핵심적인 진리는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책이나 스승이 알려준 지식은 죽은 것입니다. 많은 교수나 학자들이 깨달음과 명상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말은 체험된 진실이 아니라 지식을 모아 체계화한 것이므로 그는 깨달음을 알지 못합니다.

가능한 깨달음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들 혹은 당신이 평화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도움이 되는 방편을 찾아 가까이 해 보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의심 없이 무언가 ‘앎‘이 명확해져 가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두 개의 마음으로부터 우선 자유로워지는 방편은 스스로 하나인 상태를 일상에서 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좋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몸과 마음을 잘 돌보고 원할 때 행동하는 깨어있음으로 솔직해지라 하는 것이군요. 솔직해지는 것은 퍽 두렵습니다. 그래서 솔직할 수 없는 제 안의 고통, 분노 무기력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감추고 억압해온 긴장으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니까 마음의 반항이나 갈등이 줄어들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질문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어떤 답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물처럼 흘러 저 강 건너에 도착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의 분열들이 앎으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은 십우도에서  소를 발견하고 소 등위에 타는 행위와 같습니다. 어떤 마음도 발생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으나 잘 모르기 때문에 무지로 고통과 집착을 만들지요. 이 마음을 알고 잘 다루어 소 등위에 타고 지는 노을을 즐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없이 어떻게 문득 영원한 평화 안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스승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스승이 같이 수행하자 할 때 그의 지도를 받지 못한 것을 한편으로는 종종 후회하고 있더라고요.     


질문

우선 스승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진리에 온전히 마음을 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승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은 형상화된 구루를 스승이라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는 한 그런 스승을 추구하고 만나야 이룰 것이라 생각하는 한 그 한계 안에 머물 것입니다. 물론 초기 입문과정에 요가나 수행법 등은 스승이 있으면 수월하고 도움이 됩니다만 지금 당신에게는 바로 당신의 모습이 스승입니다. 구도의 과정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 당신 마음의 돌덩어리들을 거두어 내시는 것이 우선 스승이 될 것입니다. 우주는 당신이 준비가 되면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스승이 필요한 때 스승은 다가오곤 합니다. 아이들이나 남편 혹은 부인이 내가 부족한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인 경우도 많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질문

깨달음은 마음으로 보면, 단순한 조건 없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어떤 상태이기도 합니다. 깨어나고 싶어 하는 참나를 막고 있는 단단한 내 마음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명상의 일부입니다. 인간 만이 생각과 감정으로 가장 불행한 상태로 살고 있지요. 뜰 앞에 잣나무는 그저 평화롭습니다. 즉 스승이 당신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만난 분이 그 역할을 잠시 도왔던 것뿐입니다. 당신이 절실한 마음이 경험을 만든 것이지 그가 당신에게 선물처럼 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도 당신 안에 평안함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삶 안에서 평온한 자신과 사랑이나 기쁨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스승이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그분은 이미 돌아가셔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아쉽습니다. 살아계셨다면 다시 만났을 텐데요.     

질문

잠시 양자역학을 떠올려 비유적으로 설명해 볼까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시공을 넘어서 항상 존재하는 에너지입니다. 집중한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 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몰입력이 있으시다면 견성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가끔 전보다 평안해지고 과거와 같이 많이 괴롭기 이전에 알아차리고 마음에 끄달리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마음은 지나가는 것을 아니까요.     

질문

당신 안에 평화와 고요가 없었다면, 그것을 느끼실 수 있었을까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숙고해 보고 하나의 마음으로 대답해 주세요.     

아, 내 안에 고요가 없다면 못 느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안에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겠지요.      

질문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느낌을 내면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참나는 사랑이며 신과 우주의 조화는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 따스하고 감싸며 긍정하는 에너지와 내면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던 멍을 때리던 이 느낌을 존중할수록 참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없는 상태로는 세상을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나와 삶이 둘로 나뉘어진 것으로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은 평화와 고요의 순간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어디로 갔을까요?     

질문

아무데도 간 적이 없습니다. 늘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의심하며 집중하지 않으니까 못 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질문

한번 경험한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린시절 경험한 것들을 극복은 할 수 있지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정적인 아픔을 통해 배움을 성취하면 아픔이 아니라 감사가 되는 것을 당신도 알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체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승화가 된 것 뿐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생존을 위해 긍정체험 보다 부정적인 체험은 방어하거나 생존하기 위해 쉽게 저장하는 반면 긍정체험은 도파민이 끝나면 사라집니다. 당신은 욕망으로 체험을 다시 욕망하는 것은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기억을 통해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체험에 집중하고 떠올리면 그 평화가 자라납니다. 늘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시절이 당신 안에 있는 것처럼. 당신은 명상을 통해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몇몇 순간에는 스스로 힘든 마음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도 하고, 더 힘들 때는 호흡에 집중하면 건너 뛰어질 때도 있고, 가끔은 생각 없는 공간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상에서 나오면 여전히 마음 상태가 무거운 것을 보면 화도 나고 답답합니다.     

질문

자, 그럼 이제부터 당신이 믿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 대해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고 당신이 만든 현재 마음의 주인은 오직 당신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선,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나갈 마음이 서야 합니다. 마음은 마음으로도 다스릴 줄도 알아야 주인의식과 행복감이 자리를 잡습니다.     

해보겠습니다. 무엇이든.     

질문

당신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큰 짐은 책임감입니다. 무책임한 사람을 당신은 싫어하고 심각한 경우 화가 나지요? 어린 시절부터 공부 잘하고 모범생으로 살고 지금도 모범 가장으로 잘 살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임감입니다. 그런 태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당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임감 없는 사람들을 볼 때 가장 화가 치솟습니다.     

질문

당신이 지성의 힘을 활용해서 당신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책임감 보다는 각자에게는 이유가 있고 신의 뜻 대로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바꿔보세요. 당신 만 잘난 것이 아니라 모두 신성을 가진 자신만의 존재들입니다. 어리석고 게으른 것도 그들의 선택이고

당신이 해줄 것이 있다면 따스하고 진심 어린 지지입니다. 신은 그렇게 살고 있고 우리 모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신뢰하고 당신 자신의 일을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남는 시간에는 호흡에 집중하며 당신의 가슴으로 돌아가 보세요. 당신 가슴의 빛과 따스함으로 돌아가 대상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느끼는 부정적 마음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어 볼까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당신의 현재 마음은 당신이 바꿀 수 있습니다.

외부로 열려 있는 생각, 감상, 마음, 느낌에 몰두하지 마시고 내면으로 돌아와 휴식하는 시간을 늘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판단, 분별은 진리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 생각으로 당신 자신도 끝없이 분별하고 판단하고 있어 정작 견성 속에서 만난 침묵과 고요의 아름다움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에너지를 외부에만 사용한다면 명상을 아무리 해도 일상에서 평화를 맛보기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일에 몰두하다가도 잠시 내면의 고요로 돌아와 만족스럽게 쉰다는 느낌을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운전 중에 신호등에 걸릴 때 음악을 듣거나 침묵하며 모든 감각을 멈추어 보셔도 좋습니다.      

일상에서 견성의 느낌을 살려 보란 말로 들립니다.     

질문

맞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참나의 평안한 체험이 있고 그 체험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나는 멀리 있지도 않고 엄청난 기적 같은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체험을 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특별한 체험 만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멍해지고 공허해진다면 공에 빠진 것입니다. 이때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와 평범하게 살아지지도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나 잘 견디며 마음을 잘 다스리면 과거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긴장이 풀리는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구도자를 자처하던 사람들의 역사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수행을 오래 해도 진정이 없고 허무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하리쉬와 오쇼의 아주 가까운 제자들 중 자살한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삶은 늘 즐길만한 아름다움이 있고 생활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이 없는 깨달음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그 

아, 제가 좀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종 종 너무 허무한데 살아야 하고 집착할 것이 없는데 책임감으로 살고 있는 진퇴양난인 느낌이랄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말씀하신 것을 좀 자주 훈련해 보겠습니다.

(한 달 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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