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며칠 전

2025년 6월 27일

by 노크
앞으로 이어지는 몇 편의 글은 순천을 떠나기 전 며칠 동안의 일상을 그린 것이다. 10여 년을 넘게 살았으며 정년퇴직 전 직장생활 마지막을 정리하며 쉬었던 시간들의 글이다. 남편과 둘이 내려왔다가 남편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나 혼자 남아 9개월 남은 정년을 마무리하는 회환의 글이다.


퇴직을 앞두고 세 달 전 생겼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 민원을 접수했다. 그리고

오늘 근로감독관과 면담이 있어 노동청에 갔다.

그런 일에 혼자 가는 건 마음이 힘들다며 **샘이 동행해 주었다. 순천에서 여수까지는 넉넉히 1시간 정도의 거리다. 내차로 가려했는데 자신의 차로 가자한다.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얼마를 기다리니 그가 왔다.

차에서 내린 그는 트렁크에서 꺼낸 참외 박스 하나와 두둑한 쇼핑백을 내밀며 말한다.

참외가 맛있어서 한 박스 주문했으니 서울 가서 먹고요
이건 새벽에 밭에 가서 따온 호박잎이랑 주먹만 한 호박 하나, 고추 조금
그리고 상추예요.

그가 방긋 웃는다.

나는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황스러웠지만 일단 덥석 받았다. 무거워 보였기에. 서둘러 집에 놔두고 차에 올랐다. 내 볼 일이라 내차를 타고 가려했다고 하니 오늘은 우리의 이별여행이라 자신이 안내를 한다고 한다.


이별여행.

순간 유행가 가사처럼 느껴진 그 말이 우스우면서도 쓸쓸했다. 우리가 연인이 아닌지라 이별여행이란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10년 가까이 한 하늘 아래에 살다가 내가 멀리 이사를 가니 이별 아닌 이별이다. 이사를 가면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살면서 그간 멀다는 이유로 서울친구들의 모임을 자주 가지 못했던 것처럼 이사 가면 이곳도 자주 오지는 못하리라.

아쉬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서대회무침이 맛있는 집이란다. 빨간 서대회에 밥과 김가루를 넣고 참기름을 듬뿍 둘러 비벼먹으란다. 그간 이곳에서의 아픈 기억을 서대회에 싹싹 비벼 먹고 새롭게 출발하라며.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니고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의 말 한마디가 따듯하게 다가온다.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그가 고마워 식대를 내려하니 아니란다. 이별여행은 자신이 준비한 거니 자신이 지불한단다. 나는 커피를 샀다. 시원한 과일 요구르트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지만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만 더할 뿐이다.

시간이 되어 나는 근로감독관을 만나러 갔고 그는 차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형제도 아니고 남편도 아닌데 나의 아픔에 이렇게까지 동참해 주다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감독관과의 면담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3시간 가까이.

당사자인 나는 마땅히 견뎌야 할 시간이었지만 동행한 그는 기약 없는 그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했을까?

차에 올라타며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연발했지만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수고했어요 고생했지요 한다.

내일에 내가 한 수고인데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멋쩍었다. 이 일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도 전혀 아닌데 나의 일에 이렇게 마음을 써주다니 너무 고마웠다.

그저 내가 당한 일에 대해 그도 마음이 아프고 공감하는 터라 기꺼이 여기까지 동행해 주었단다.

남편도 가족도 없이 혼자 있는 날 위해.

감독관과의 세 시간 면담에 진이 빠져 배가 고팠고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아팠다. 그저 상황을 설명한 것 밖에 없는데.

저녁을 먹고 8시가 돼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따듯한 악수를 나누고.

아무것도 안 한 나도 이리 피곤하고 힘든데 새벽부터 일하고 운전하며 기약 없이 나를 기다린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종일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사람


나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디딤돌이 되자라는 게 내 삶의 모토였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샘에 비하니 난 한참 모자란다. 부끄러웠다.

그는 늘 그랬다.

내가 코로나에 걸려 격리됐을 때 죽을 끓여 집 앞에 두고 갔다. 그것도 들통으로 한 통이나.

멀리 영국에서 온 딸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크를 주문해 전달해 줬고

내가 한 장의 편지를 보내면 그의 답장은 서너 장이나 되었다.

퇴직을 앞두고 화려한 꽃바구니를 보내준 것도 그녀였다.

얼마 전 함께한 제주 여행에서도 그는 늘 날 먼저 배려했다.

언제나 내편에 되어주었고 따듯하게 나를 받아줬다.

그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아낌없이 나누고 베푸는 그를 보며 난 늘 작아지는 느낌이다.

살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거저 받는 축복이고 은총이다.

갚을 수 없는 사랑에 난 그저 그를 위해 기도 할 뿐이다.

달콤한 참외 향기가 방안 가득 퍼진다. 쓸쓸하고 외로웠던 정년퇴직에 그녀의 따듯함이 나를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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