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원룸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하며 전화를 받으니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호박 하나 줄까요? 방금 밭에서 따왔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주인은 연하고 작은 호박 하나를 건네주고 올라갔다.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일주일, 생애 처음으로 혼자 사는 원룸 생활을 시작했다.
이 건물은 1·2층만 해도 20세대가 넘고 주인은 3층에 산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이 원룸을 관리하며 노후를 재미있게 살고 있다.
호박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니 피식 웃음이 났다. 연두빛 바탕에 초록 줄무늬가 있는 호박은 된장찌개에 숭숭 썰어 넣어도 맛있겠고, 새우젓에 볶아도 맛있겠다.
호박을 보니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커다란 화분 몇 개에 방울토마토, 고추, 상추 모종을 심었다. 그리고 올해는 호박 모종까지 하나 더 들였다.
“호박 열리면 우리 된장찌개 해 먹어요.”
교인들에게 그렇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어린 모종은 내 정성을 알아주듯 쑥쑥 자랐고, 어느 날 노란 호박꽃을 활짝 피워 나를 맞았다.
“어머나, 이쁘다. 네가 호박꽃이구나.”
아침마다 마주하던 그 노란 꽃은 세상 어떤 장미보다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이 진 자리에 새끼손가락만 한 호박이 열렸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자랑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해 여름은 비가 잦았다. 거름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탓에 넝쿨은 점점 말라가고, 끝내 호박은 자라지 못한 채 시들어버렸다.
아침마다 기쁨을 주던 호박꽃이 사라지자 허전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창문을 여니 담을 타고 호박 넝쿨이 내려와 있었다. 함박웃음을 짓는 노란 호박꽃과 함께.
12년간의 목회를 마무리하고 남편은 서울로 떠났다.
나는 정년까지 10달 남짓 남아 있어 혼자 이곳 원룸에 머물기로 했다.
첫날은 남편이 함께 있어 안심이었지만, 어제 그는 떠나고 나만 이 작은 공간에 남았다.
볼품없는 방 안에 혼자 남은 외로움을 달래주듯 호박꽃이 환히 피어 있었다.
호박꽃을 바라보다 문득 성경 속 요나가 떠올랐다.
사명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갔던 요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그를 살려내어 다시 니느웨로 보내셨다.
회개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던 요나를 위해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해 그늘이 되게 하셨고, 요나는 그것으로
심히 기뻐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 넝쿨을 말라버리게 하셨다.
분노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한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내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호박 하나로 시작된 내 생각은 어느새 요나와 하나님의 이야기에 닿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나날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나는 이 작은 방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분이 주신 박넝쿨 그늘 아래 앉아, 오늘도 은혜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