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까지 걷는 길, 가을을 만나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집에만 있기엔 너무 아쉬워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디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밤새 쏟아진 폭우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전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열차 안에서 문득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저렇게 부지런히 가는 걸까? 나도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대성리에서 내렸다.
북한강을 따라 청평까지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작년에는 자전거로 이 길을 달려 춘천까지 다녀왔었다.
용기 내어 혼자 떠났던 길, 그리고 춘천에서 만난 소양강 처녀.
오늘은 그 길을 걷는다. 천천히, 발걸음으로.
자전거를 탈 때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리고, 가끔 햇살이 구름 사이로 방긋 나타났다 숨기를 반복한다.
어젯밤 내린 비로 강물은 조금 거세졌고 색은 황토빛이다.
무엇보다 바람이 예술이다.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나를 가볍게 만든다.
작은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말을 건넨다.
너희도 여름 내내 애썼구나.
길가에 떨어진 밤송이를 발견했다.
어릴 적처럼 발로 살살 밟아 껍질을 벗기니, 밤톨이 새색시처럼 고운 얼굴을 내민다.
너도 여름 내 익느라 고생했지.
장석주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밤톨 하나를 주머니에 넣으며 괜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걷다 보니 어제 내린 비로 물이 길까지 흘러넘쳤다.
돌아갈 수도 없고, 길도 없었다.
신발을 벗고 과감히 물속으로 들어섰다.
네가 길을 안내해주지 않으니 내가 길을 만들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두 번이나 물길을 건넜지만, 세 번째 앞에서는 잠시 주저앉았다.
버스를 타야 하나 싶었지만 다시 신발을 벗었다.
내가 가는 길은 나와의 약속이다.
포기하지 않기. 핑계 대지 않기. 대충하지 않기.
그래서 결국 목표한 곳, 청평역까지 두 발로 도착했다.
청평.
대학 시절 MT와 수련회로 자주 왔던 곳.
이름만 들어도 설레고, 추억이 깃든 곳이다.
이제 그 길을 두 발로 걸어왔다.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파란 바탕을 펼쳐주었고,
구름들은 저마다 그림을 그리느라 바쁘다.
벤치에 잠깐 누워 하늘을 본다.
구름도, 바람도, 공기도 완연한 가을이다.
가지 마라, 가을아.
조금만 더 머물러라.
계절처럼 나의 삶도 흘러가지만,
오늘 이 길에서 만난 가을은 나에게 다시 걷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