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뵐게요.”
짧은 통화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전철에 올랐다.
가본 듯도 하고, 처음인 듯도 한 거리.
멀리 청양에서 온 언니와 오빠들은 이미 와 있었다.
지난 6월, 아버지 산소에서 만났을 때 그는 항암 치료로 머리가 모두 빠져 민머리였고,
한 달 만에 본 그의 모습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발바닥까지 부어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고, 황달로 노랗게 변한 얼굴은 어딘가 낯설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오빠와는 12년 만의 만남이었고, 다른 형제들과도 오래간만이다.
먼저 와 있던 그들은 해묵은 감정을 꺼내며 옥신각신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 지난 일들에 대한 얘기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오히려 말해야 할 것도 있었다.
나는 전날 통화에서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요. 쌓인 감정, 억울했던 거… 다 털어놔야 후회 없어요.”
물론 겹겹이 쌓인 감정의 골이 하루아침에 겨울 눈 녹듯 사라질 리 없다. 그러나 10년을 넘게 가슴에 품었던
서운함은 말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은 결국 눈물로 지난 세월을 가슴에 묻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은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으면서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 자식만 많이 낳았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집에서 자란 우리는 늘 뭔가에 목말라 있었고, 그래서일까, 마음속에는 늘 한을 품고 살았다.
자주 다퉜고 자주 멀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만에 엄마마저 떠나시자 나는 형제들과 완전히 연을 끊었다.
아옹다옹하며 속 썩을 바에야, 없이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십 년 가까이 조용히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시간이 흐르며 미움이 옅어진 걸까.
내가 형제들과 등을 돌린 이유는 그들이 부모님이 병들고 힘들 때 외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모님도 안 계시니, 그들을 미워할 이유도 사라졌다.
서운함이야 찌꺼기처럼 남아 있겠지만 피로 이어진 인연을 죽을 때까지 끊고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연락을 했다. 처음 연락한 사람이 바로 큰오빠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은 암 말기였다. 이제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이 너무 허망했다.
왜 우리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겨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일까.
죽음은 분명 슬픔이지만, 때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가 죽음을 앞두지 않았다면,
형제들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다시 모일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자녀들과의 관계마저 단절했던 큰오빠는 이번 일을 계기로 조카들과도 화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은, 작은 기적처럼 가족을 다시 묶어주는 순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화목한 가족을 꿈꾼다. 자녀에게 헌신하는 부모, 다정한 형제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남에겐 잘하면서 정작 가족에게는 소홀한 사람도 많고, 여러 이유로 형제자매와 연을 끊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늘어나는 고독사, 무연고 시신의 소식은 우리 사회가 가족에게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말해준다.
만약 큰오빠가 자신의 병을 끝까지 숨겼더라면 우리는 그를 보내고
평생 씻지 못할 후회를 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미움과 오해를 풀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 아닐까.
억울함도, 서운함도,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기에 이 생에서 털어낼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
그렇게 만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이 고단한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엔 모든 형제들과 그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데 모인 잔치의 자리였다. 화해와 용서의 자리였고, 후회와 아쉬움의 자리였으며 회복과 만남의 자리였다.
3일 내내 자리를 지킨 우리 모두는 따듯한 마음으로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남겨진 유족들을 위로했다. 안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미안하다 진작 그러하지 못해서.....
모든 장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