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듯 나에게

by 노크
퇴직 후의 일상을 몇편의 글로 묶어 브런치북을 발행 합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여러분의 따끔한 고견과 따듯한 응원을 기대합니다



새벽과 아침 사이, 도시는 물에 잠길 듯 비가 내린다.

평소라면 산책로를 걷고 있을 시간, 오늘은 책상 앞에 앉아 나에게 편지를 쓴다.


순옥아, 안녕.

아이들과 지인들에게는 수없이 편지를 써왔지만, 나에게 쓰는 편지는 오랜만이네.

여고시절, 일기장에 써내려갔던 마음의 조각들이 문득 떠오르네.

그때처럼 오늘은, 너를 위로하고 싶어졌어.

그 누구보다 묵묵히 살아낸 너에게 말이야.

얼마 전 정년퇴직을 했지? 정말 수고 많았어.

대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지금까지 약 40년을 쉼 없이 달려왔던 너.

가정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에서 하루하루를 감당하며 살아낸 시간은

그 자체로 박수받을 만한 여정이었어.

가난한 집안에서 첫 대학생이 되었고, 무능력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 다짐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고, 가난한 부모의 무능력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자에게 가혹한 현실이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그럼에도 너는 늘 최선을 다했고, 그걸로도 충분했어.

IMF 때 남편의 실직과 빚, 그 고통 속에서도 나만이 아닌 나라 전체가 아파하니 차라리 덜 외로웠다고 했지.

오히려 견딜 수 없었던 건 암 진단을 받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을 때였을 거야.

그 고통의 시간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니. 그래도 그 시간을 견뎌낸 너는 가장 연약했지만, 가장 단단해졌지.

아빠의 마지막 길을 지킬 때, 엄마를 요양원에 두고 멀리 이사 갈 때,

아이들을 품에서 떼어 놓아야 했을 때.

그 모든 선택의 순간,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넌 혼자서 참 많이 울었지

아이들을 존중했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직도 마음 한편에 맺힌 미안함으로

가끔 목이메인다지.

목회의 자리에서, 사모라는 이름 아래 너는 늘 조용히 아파했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했던 너.

하지만 나는 알아.

그 침묵과 통곡 속에 얼마나 많은 기도와 인내가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너는 쉼을 배우고 있어.

처음에는 일하지 않는 하루가 낯설고 막막했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너에게 꼭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잖아.

잘하고 있어.

걷고, 자전거를 타고, 글을 쓰고, 때로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다시 배우는 중이지.

어린 시절, “무능력한 부모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된 너의 삶은

지금 “충분히 잘 살아낸 나를 소중히 여기자”는 성숙으로 나아가고 있어.

앞으로의 삶은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부드럽게 무언가를 향해 달리기보다

네 안을 들여다보는 여정이 되었으면 해.

그동안 남을 위해 써왔던 시간만큼

이제는 너를 위해 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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