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까지는 걸어서 20분쯤 걸린다. 이 정도 거리는 걷기에 딱 좋다.
새로운 곳에 가면 산책길과 도서관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순천에 살 때도 도서관은 늦은 밤까지 나와 함께해 주는 친구였고,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쉼터였다.
아직은 낯선 이 동네 도서관과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처럼, 공간과도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주 봐야 편해지고, 편해야 가까워질 수 있다. 순천의 도서관보다는 사람이
많고, 어린이 도서관과 연결돼 있어서 어수선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오히려 책에 집중하던 나를 쉬어가게 만든다. 아이들은 뭘 해도 사랑스럽다.
조심스레 자리를 찾았다. 마침 창가에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났다.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긴장하며 읽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나만의 도서관을 가진 듯한 이 자리가 좋다.
창밖에는 해를 당당히 마주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저들만의 노랫소리가
하늘을 울릴 것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놀이터 아래로 이어진 하천은 내가 자주 산책하는 길이다. 지금은 오리 두 마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오리들. 나도 저 오리들처럼 한낮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다.
노트북을 켜고, 새 글의 창을 연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써볼까?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꽃들, 운동하는 사람들의 정겨운 얼굴, 이 더위에도 당당히 피어나는 생명들…. 지금은 그저 일상의 끄적임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한 편의 글로 무르익기를 기대해본다.
한두 시간이 지나 책장을 둘러본다. 오늘은 어떤 책이 나와 친구가 되어줄까? 세상은 바캉스니, 호캉스니 하지만 나는 ‘독캉스’를 즐기는 중이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도서관에서 나와 놀아주는 책은 나를 단단하게 해준다.
아니, 가끔은 다 녹아버린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쉼이 되기도 한다.
『나이듦의 품격』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아직은 '나이듦'을 말하기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길로 접어들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책을
들었다.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듦이라 불리는 이 영성훈련은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검불은 걸러내며, 금방 타버리는 불꽃에 주의하고, 우리의 성장을 도와준 것을 꽉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은 나이듦의 기억, 친밀, 쇠약, 감사, 수용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을 이야기한다.
나는 한 장, 또 한 장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숨기고있던 뭔가를 들킨듯 움찔움찔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 안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진다.
그 중 나를 오래 머물게 한 문장이 있다.
“좋은 기억들을 집중적으로 기억하고 그것들을 축복하세요. 그리고 나쁜 기억들은 용서하세요.”
순천에서의 지난 11년은 내게 말 못 할 상처였다. 실패라고 생각하며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다.
그 시간은 단지 삶의 과정이었다.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을 뿐, 그 또한 하나님의 인도였고, 사랑이었다.
우리는 젊음을 바쳐 최선을 다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과거가 나를 결정짓게 두지 않으려 한다”라는 문장 앞에서
글감 노트를 꺼내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눌러 적는다.
“더 이상 나의 과거가 나를 결정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새로워진다.
그리고 내일도 새로운 나일 것이다.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이 도서관이 있는 한,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