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의 일상을 몇편의 글로 묶어 브런치북을 발행 합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여러분의 따끔한 고견과 따듯한 응원을 기대합니다.
헬멧을 쓰고 장갑을 꼈다. 자전거에 올라 조심스럽게 페달을 굴려본다.
몇 개의 건물만 지나면 자전거 전용도로가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시간.
속박에서가 아닌,오롯이 나를 위한 자유다.
이사 올 때, 세월에 묻혀 있던 많은 것을 정리했지만 이 자전거만은 버릴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함께한 녀석. 중학생이던 아들에게 중고 마트에서 사주었고, 그 후로 내가 타고 다녔다.
이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벗이자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편은 퇴직 선물로 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 자전거가 좋다. 무겁고 날렵하지 않지만,
내 손에 익숙하고 내 몸에 맞는 단 하나의 자전거니까. 나처럼 나이 들고, 세월을 함께 견뎌낸 벗이니까.
우린 참 많은 길을 달렸다. 섬진강 자전거길을 수도 없이 오갔고, 제주도 환상길도 달렸다.
고속버스에 실려 서울에 도착해서는 인천 아라뱃길과 춘천의 소양강댐까지 함께 다녀왔다. 출퇴근길도 늘 함께였고, 차가운 겨울날엔 손과 발이 시리도록 순천만과 와온 해변, 화포 해변을 따라 달렸다.
풀 죽은 나를 안장위에 묵묵히 태워준, 애인이자 친구이며, 때론 아버지 같았던 존재였다.
자전거를 타는 일이 나에겐 ‘그리움을 떨쳐내는 시간’이었다. 울 수 없을 때 바람에 울음을 실어 보냈고,
감당 못할 분노는 페달에 실어 삭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리고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져 있었다.
걷는 것도 좋지만, 자전거는 좀 더 멀리 데려가 줘서 좋다. 속도는 내가 정할 수 있고,
시선은 더 멀리까지 닿는다. 힘껏 달리면 바람이 나와 함께 뛰어주고, 지칠 땐 뒤에서 밀어준다.
어떤 날엔 감정이 앞선 나를 막아주듯 바람이 페달을 멈추게도 한다. 바람은 나의 경주자이자 조력자다.
이곳에 이사와 가장 좋은 점은 언제든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환경이다. 늦은 시간에도 한강 자전거길엔
사람들이 있고, 밝은 가로등과 도시의 조명이 안전한 길을 비춘다. 섬진강을 따라 달리던 그리운 길이
문득 떠오른다. 다만 그때는 밤길을 달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 길을 밤에 달렸다면,
마음의 심연 속으로 푹 빠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강물처럼 흐르는 길을 따라 달리던 중, 건너편 하늘 위로 커다란 달이 솟아오른다.
“어? 저게 달이야? 이렇게 큰 달은 처음인데. 슈퍼문인가?”
세상에. 달이 나를 반기러 나온 것 같았다. 환한 미소로, 아무 말 없이.
오늘은 달이 나의 동무가 되었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입으로는 말 못했지만, 가슴으로는 충분히 전했다.
달과 함께 내달리며, 나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순천에서 자전거를 타던 시절, 마포에서 뚝섬을 오가던 주말들.
그 시절의 나는 늘 뭔가가 부러웠다.
한강에서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 가족, 연인,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이들조차도.
그들 속에서 나만 외롭고 버거워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의 무게가 컸던 시절이었기에 더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삶의 짐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나를 부러워 할수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안다.
겁 없이 자전거 위에서 웃으며 달리는 나를, 누군가는 멋지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강거너편 달은 밝은데
“비가 오네? 그럼 빗속을 달려볼까?”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페달에 힘을 준다.
“제대로 한 번 달려보자구."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온몸과 마음을 다해 달리면… 더 이상은 따라오지 못하겠지.
얼마를 달렸을까? 바람이 속삭인다.
“됐어. 그만해도 돼. 아주 잘했어.”
어느새 나와 나의 자전거는
달을 향해 날아 오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