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에서
간밤에 내린 비로 도로는 젖어 있었고,
공기는 차지 않았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넘기다 문득 광림 수도원이 떠올랐다.
오래 잊고 지냈던 곳이다.
아무도 없는 공원을 오른다.
밤새 내린 비가 빈 가지마다 물방울을 매달아 놓았다.
잎을 떨군 은행나무들은 말없이 서 있고,
바닥의 낙엽들은 비에 젖어 촉촉하다.
“주님, 오늘 이 길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공원 입구의 텅 빈 야외무대.
벽면에 덩그러니 남은 십자가 앞에서 묻는다.
제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남편인가요? 목회인가요? 가난인가요?....
난 내 십자가가 대단한 건 줄았다.
희생과 봉사와 헌신 그리고 겸손 같은 것들.
그런데 현재를 살아가는 내 삶이 내 십자가였다.
자꾸만 내 던져 비리고 싶어 했던 십자가.
그러나 끝내 붙들고 가야 할
내 십자가.
열두 해 혈우병을 앓던 여인에게
건강할지어다라고 선포하신 주님.
그 조각상 앞에서 나는 울었다.
병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아파서.
손톱 밑 가시 같은 아픔이 계속 나를 찔렀다.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 앞에서
“저도 죽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산은 적막했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내 울음을
가려주었다.
난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60년 인생길에 안 힘든 때가 있었나
딸아이를 낳다 중환자실에 있었던 일,
암 진단을 받았던 시간,
IMF로 남편이 직장을 잃었던 날들.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그때보다
더 힘든 일들도 많을 텐데,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는가?
맞다.
그게 나였다.
주님과의 마지막 식사시간.
12명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저들의 중에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은 삼십의 이득뿐 아니라
은밀한 욕망까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며
나를 드러내려 했던 교만.
내가 정작 힘들어하는 이유가 아닐까....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조각상 앞에선 숨도 멈춰 섰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주님 앞에
나도 엎드려 본다.
그분의 절규에 내 뼈가 삭는다.
그분의 기도 앞에 나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나의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는 하늘로 퍼진다.
나무들도 조용히 젖은 물기를 떨어낸다.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렸고 나는 가만히 물었다.
왜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남편 때문에 힘들어요
가난해서 슬퍼요
목회로 힘들어요.....
나 때문은 하나 없고 모두 너 때문에라고 핑계 댔던 수많은 시간들.
하루에도 수십 번 그분을 못 박는 나.
부활의 동산에 이르러
두 팔 벌리고 서 계신 주님을 오래 바라본다.
“그날엔, 믿음 없는 저를 꼭 안아주세요.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나이 예순.
은퇴를 하고, 교회를 내려놓고,
낯선 곳으로 옮겨왔다.
앞날이 두려워 마음이 무거웠다.
누구나 한 번은 지나가는 이 시간.
그래. 또 걸어보자.
늘 함께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