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삶의 사이에서

여행이란 무엇일까

by 노크

한달을 다녀온 자리

낯선 이국땅에서 한 달가량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익숙한 풍경과 하잘것없는 내 살림살이마저 반갑고 편안하다. 그곳에서 적응된 몸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아직도 밤과 낮이 몸에서 따로

논다.


퇴직을 하고, 생일 즈음에 남편과 함께 딸이 있는 영국에 가고 싶었던 오래된 꿈이 어렵사리 현실이 되어, 남편은 보름쯤 함께 있 다 돌아갔고 나는 조금 더 남아 한 달을 채웠다.


함께 동행한 부부와 런던과 파리를 여행한 보름은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다. 그들을 보내고는 딸과 크로아티아를 다녀왔고, 남은 시간은 온전히 런던의 날씨를 누리는 시간이었다.


혼자 걷는 런던의 시간

특별한 일정도, 해야 할 일도 없이 가벼운 정리만 하며 지낸 나날은 편안했고 자유로웠다. 딸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고, 이국의 땅이지만 대부분의 식사를 한식으로 해결할 수 있어 몸도 마음도 편했다. 때로는 혼자서 내셔널 갤러리나 대영박물관을 찾기도 했다.


딸의 쉼 없는 전화와 걱정 섞인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내셔널 갤러리를 온종일 혼자서 즐기는 일은 오래전 부터 마음속에 간직해온 버킷리스트였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세 번이나 다녀간 나라라 거리의 윤곽은 익숙했지만, 혼자 길을 찾고 혼자 걷는 시간은 마치 걸리버 여행기 속 주인공처럼 낯설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어설픈 영어와 간판 읽기, 그리고 구글 지도가 새로운 나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여행지가 아닌, 사람들의 나라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의 삶이 뒤섞인 런던은 언제나 활기찼고,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조금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도 삶은 묵묵히, 그러나 부단히 이어지고 있었다.


대영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를 비롯한 많은 미술관이 무료로 개방된 나라. 문화와 역사를 주도하면서도 옛것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는 저 느긋한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백화점의 현란한 불빛 아래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있는 노숙자를 내쫓는 사람도 없고, 연착되거나 운행하지 않는 전철 앞에서 소리치며 화를 내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풍경이라 낯설고도 놀라웠다.


그곳에도 우리나라의 다이소 같은 가게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채소와 과일을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상인들은 여전히 바빴다. 중고 물건과 재활용품을 파는 가게들도 곳곳에 있었다.
그들의 삶도, 우리네의 삶도 결국은 먹고살며 이어가는 하루하루라는 사실이 세계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평소보다 조금은 화려한 옷을 싸 들고 떠났던 여행길.
깨끗한 숙소와 식당, 눈부신 관광지만 보던 시선이 조금씩 그들의 일상을 향하자, 비로소 이곳이 ‘여행지’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3~4년에 한 번씩 떠났던 여행은 일상과 직장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와 문화를 경험하며 잠시의 해방감과 활력을 얻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경비를 마련하고, 연휴와 휴가를 모아 겨우 보름을 채우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다.


갈 곳도 많고 욕심도 많던 아줌마 셋은, 스무 살 딸이 지칠 만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같은 포즈로 혼자 찍고, 셋이 함께 찍고, 가방과 스카프를 바꿔가며 또 찍고…. 낮에도 찍고, 야경이라며

또 찍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깔깔거리며 셔터를 눌러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이라기보다 짧은 한 달 살이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동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어디에서든 삶은 비슷하게 흐르고 있다는 깨달음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오랜 저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도,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여행은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만나는 일

여행은 어쩌면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야 그동안 흘겨보던 내 삶을 끌어안고, 조용히 다독여 주는 일.
“그동안 잘 살아왔어. 참 기특했어.”


아직 쓰이지않은 글들

한 달 동안 매일매일 한 편의 글이 머릿속에서 써 내려가고, 추억과 행복이 차곡차곡 쌓였지만 아직은 그저 생각 속에서 맴돌 뿐이다.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설익은 경험의 단계라서, 머리와 가슴을 오가며 시간 속에서 조금 더 숙성되어야 글이라는 형식을 빌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겠지.


엉킨 실타래가 어느 순간 술술 풀리듯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진 속 아버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