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아버지에게

by 노크

예년과 달리 길어진 장마는 높은 습기와 기온을 함께 안고 와 사람을 지치게 한다. 평소라면 봄과 가을의 선선한 저녁 바람 속에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즐거움을 누렸겠지만, 장마로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는 책상 앞에 앉는 일조차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은 그 용기를 내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노트북이 부팅되는 동안, 문득 책상 유리판 밑에 끼워둔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이다. 다른 사진들은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해두었지만, 이 사진은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책상 유리판에 끼워두었던 것 같다. 생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장로로 추대될 때 찍은 사진이니, 아마 20년도 더 된 모습일 것이다.


진한 남색의 줄무늬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은 다소곳이 모은 채 하얀 셔츠 위에 미색과 연 빨간색이 교차한 넥타이를 맸다. 양복 윗주머니에는 향나무 잎과 장미를 묶은 작은 꽃도 꽂았다.

흰머리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검은 머리결이 돋보인다. 아마도 행사 직전에 어머니가 염색을 도왔으리라. 두 분이 오순도순, 때로는 옥신각신하며 염색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얼굴에는 당시 유행하던 알이 큰 안경을 썼고, 입술은 꾹 다물고 있다.


그의 시선은 45도 아래를 향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 달리, 다소 긴장한 듯 부자연스럽다. 장로 정립을 앞둔 그는 목사와 교인들, 하객 앞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두려움 속에 긴장하고 있었으리라.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아버지는 혼신을 다해 살아왔다. 인생의 고비마다 삶의 파도는 그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묵묵히 걸어왔다. 그렇게 60여 년을 살아온 끝에, 여전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그가 한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거룩한 무게를 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무슨 장로라고, 감히 이 일을 어찌 감당할까?”


그 직분은 아버지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거부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교인들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장로 장립은, 그가 목회자와 교회, 성도를 섬기며 지켜야 하는 귀하고도 어려운 책임을 보여주었다. 그 날 아버지의 표정은 입을 꼭 다문 채 담담했다.


나의 아버지, 이*열 장로는 가난한 집에 재가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배다른 형제들이 있었지만 왕래는 적었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늘 외로웠다. 학교는 꿈도 못 꾸던 시절, 그는 한글과 한자를 어깨너머로 익히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배웠다.

어머니는 손없는 집안에 여섯 명 이상의 자녀를 낳았다. 가난하고 배운것 없는 살림에, 배고픈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아버지의 삶은 늘 고단했다. 고향에서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걸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아버지는 서울 상경을 결단했고 허드렛일로 가족을 부양하며, 노년에 암 선고를 받을 때까지도 그는 생업을 이어갔다.


노년의 아버지 직업은 구두 수선공이었다. 손과 얼굴, 옷에 구두약이 묻어도 그는 일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다. 하루 4~5만 원의 벌이지만 잔돈까지 엄마에게 헌납했다. 엄마는 그 돈을 깨끗이 정리해 생활비와 장보기, 때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두부를 사는 데 썼다. 아버지의 구둣방 잔돈 함에는 늘 500원짜리 동전 몇 개가 있었다. 손녀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손녀는 몰래 가져가 쓰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버지는 암 투병 중에도 장로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신실한 청지기였다. 새벽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하며,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찬송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던 주님을 만나러

이른 새벽 먼 길을 떠났다.


사진 속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렇게 가시니, 정말 좋으세요? 아버지가 가신 곳이라면 분명 좋은 곳일 거라

믿어요. 나도 빨리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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