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하루

스플리트에서

by 노크


아드리아해의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창을 열자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아파트만 한 호화 유람선 두 척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순간 마음이 저 쪽으로 끌렸다.

크루즈 여행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눈앞의 풍경 하나로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아침 식사는 햇반과 미역국, 그리고 멸치조림.

어젯밤 먹물 빠에야의 여운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었지만,

한국에서 챙겨 온 이 소박한 메뉴도 더없이 근사하다.


스플리트, 로마 황제의 도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달마티안 해변의 도시 스플리트.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위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이곳에

궁전을 짓고 살았을 만큼 풍광이 뛰어난 도시다.

궁전과 아드리아해가 어우러진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여기서는 짐 보관소가 별도의 자동 캐비닛이 아니라

가게 한쪽에서 직접 맡아주는 방식이었다.

조금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 얼굴을 마주하고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오히려 따뜻했다.

우리는 스플리트에 약 4시간만 머물 계획이라

평소보다 발걸음이 훨씬 빨랐다.


황금의 문을 지나, 궁전 속으로


‘황금의 문’을 통해 궁전 구역에 들어갔다.

많은 부분이 파괴된 뒤 복원 중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고대와 현재가 겹쳐 보이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궁전 주변에는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젤라토 가게가 끝없이 이어졌다.

궁전 내부는 입장료가 있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바깥만 둘러봐도 충분히 볼거리가 가득했다.

주피터 신전 옆 열주광장은 고대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지만,

양옆의 계단은 방석을 깔고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노천카페로 변해 있었다.

입구 쪽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스핑크스 석상이 여전히 터를 지키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어 들어가 보니

하늘이 훤히 보이는 '돔' 공간.

예전에는 지위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장소였다고 한다.

돔 속은 소리가 잘 울려서인지, 지금은 커다란 울림을 이용한

아카펠라 공연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성 오중창을 들었다.

악기 하나 없이 목소리만으로 채워지는 그 소리는

돔을 가득 채웠다가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듯했다.


오전 시장과 스플리트의 골목들


열주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

싱싱한 생선을 파는 **스플리트 어판장(수산시장)**이 나온다.

우리나라 노량진 시장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룻밤 묵었다면 이곳에서 생선을 사서 요리해 먹고 싶었는데

못내 아쉬웠다.

시장 뒤쪽으로는 베네치아 풍 바로크 건물들이 가득한

나르도니 광장이 펼쳐졌다.

노천카페, 쇼핑 거리, 사진 찍기 좋은 골목들…

짧은 시간 동안 스플리트의 매력을 빠르게 지나쳐야 했다.

배가 고파져 오래된 전통 버거집에서 버거를 사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리마 해안가에서 먹기로 했다.


리마 해안가에서 먹은 버거 한 입


딸은 좋아하는 버거를 손에 들고 기대에 부풀었다.

나도 오늘은 TV에서 보던 것처럼 큰 입을 벌려

버거를 제대로 먹어보자며 용기를 냈다.

하지만 문제는 비둘기.

비둘기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딸은

버거를 먹는 내내 비둘기 떼의 접근에 진땀을 뺐다.

게다가 버거는 짠맛이 강해 생각만큼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남은 건 챙겨두고,

벤치에 앉아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햇빛은 찬란했고

바다의 윤슬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야자수 그늘 아래 앉아 항구에 정박한 유람선을 바라보는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싱싱한 과일과 꽃, 그리고 아쉬운 작별


터미널로 돌아가기 전, 아침 시장을 다시 보고 싶어 갔다.

물건을 다 팔고 철수한 가게도 있었지만

싱싱한 과일과 꽃, 올리브와 트러플 가게들이 여전히 우리를 유혹했다.

꽃값이 저렴해 한 다발 사고 싶었지만

곧 4시간 이동해 플리트비체로 가야 하니

결국 과일만 조금 사서 돌아섰다.

짧은 4시간 동안 만난 스플리트.

짧기에 더 밀도 있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남는 도시였다.

날씨가 너무 좋아 여행의 즐거움도 배가 되었다.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크로아티아 여행의 백미인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떠났다.

스플리트여, 안녕.

반짝였던 너의 모습을 오래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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