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니크의 부자카페에서
(Buža) 카페(Buža) 카페
남편과 친구 부부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혼자 남은 2주의 시간.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결국 크로아티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마음 같아서는 북유럽으로 가고 싶었지만, 오로라를 보기엔 애매한 시기였고 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한 주 뒤에 떠나고 싶었지만 그 시기는 이곳의 학교들이 중간기 방학이라 모든 비용이 두 배라고 했다.
결국 딸과 나는 3박 4일의 짧은 일정으로, 크로아티아의 주요 도시만 빠르게 둘러보기로 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배낭 하나씩에 최소한의 짐만 넣고, 음식도 챙겼다.
남은 김치볶음, 멸치조림, 컵라면, 물만 넣어 조리되는 미역국과 명태국…
물도 계속 사 마시기 아까워 끓여서 한국 티백을 넣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검색대에서 걸리고 말았다.
음식 냄새 때문인지 직원이 우리 가방을 열어보며 웃으며 말했다.
“All food!”
우리는 또 웃으며 가방을 닫았다. 하지만 아마 그 직원은 모를 것이다.
유럽의 비싼 물가 속에서 이 음식들이 얼마나 든든한지.
물론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폭등한 외식 물가를 런던과 파리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래서 아낄 건 아끼기로 했다.
그럼에도 딸은 “여기서 아니면 못 먹는 음식”이라며 가끔은 과감하게 외식값을 지불했다.
좋아하는 커피도 원두 사다 직접 내려 마시는 아이인데,
엄마 마음을 배려해 주려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왕복 8만 원짜리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제주 가듯 가볍게 크로아티아로 날아갔다.
비행기 이륙 후 약 3시간.
드디어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내렸다.
아틀라스 버스를 앞에 두고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중세 도시가 그대로 보존된 두브로브니크 구도시로 향했다.
아드리아해를 품은 작은 도시, 두브로브니크.
유럽 사람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휴양지이자,
중세의 시간이 고스란히 흐르는 곳.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을 상상하며 버스가 달리기만을 기다렸다.
딸의 계획은 이랬다.
오늘 성벽 투어를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그르지 산 정상에서
오렌지빛 지붕과 아드리아해를 내려다보고,
마지막엔 부자(Buža) 카페에서 석양을 보는 것.
그러나 버스를 너무 오래 기다렸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놓고 급히 필레 문으로 향했다.
스트라둔(플라차) 대로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오노프리오 분수,
왼쪽엔 성 바오로 성당이 서 있었다.
두브로브니크는 1991년 독립 전쟁 당시 세르비아 군의 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의 성당과 건물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복구와 상처 사이에서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성벽 투어를 했다면 바카르 요새에서 성안과 바다를 조망했겠지만
시간이 늦어 아쉽게도 접어야 했다.
우리는 ‘구멍’이라는 뜻의 부자(Buža) 카페를 찾아 나섰다.
절벽에 뚫린 문 없는 통로를 지나 바다를 바라보는 그 자리.
여행 프로그램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도착하니 사람들은 절벽 틈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붉은 해는 아드리아해 너머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짙푸른 바다 위에는 카약이 떠 있었고,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은 유유히 스며들 듯 움직였다.
노을은 푸른 물감 위에 붉은 물감을 흘려놓은 듯 장엄했다.
해가 사라지는 몇 초의 순간.
누군가가 먼저 박수를 쳤다.
잠시 뒤 모두가 함께 박수를 쳤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그동안 태양에게 박수를 쳐준 적이 없었을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했는데.
문득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 한 소절이 지나갔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장대한 자연의 신비함에.
딸이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골목을 이끌어갔다.
기념품 숍과 젤라토 가게,
스폰자 궁전, 구 항구, 렉터 궁전,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늦은 시간이라 내부는 닫혀 있었지만
전쟁과 독립의 시간 동안 시민들의 마음을 지켜준 공간이라 생각하니
고요함 속에서도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배낭 안에 ‘ALL FOOD’를 넣고도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으니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다.
새우 샐러드, 문어요리, 오징어 먹물 빠에야.
오래전 포르투갈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젤라토를 하나씩 들고
두브로브니크의 몽환적인 밤을 천천히 걸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들려오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
은빛 조명 아래 골목이 주는 온기.
필레 문을 나와 숙소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여행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그럼에도 충분했다.
아드리아해, 장엄한 노을, 맛있는 저녁, 작은 숙소까지.
완벽한 하루였다.
내일 역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