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빠짐없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기후재앙의 참상을 바라보며 두렵고 답답한 요즘입니다. 인류 모두가 직면하는 문제이며 모두가 감당해야 할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종말이나 멸종 같은 극단적 단어를 들먹이며 상대방에게 경고하듯 보도하는 언론의 보도 자세에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두려움을 팔아 시청률을 높이고 구독자를 높이려는 얕은 속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때는 온난화와 기후변화의 문제가 인간이 만든 재앙이냐 자연스러운 현상이냐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제는 20세기 이후 과도한 경제활동으로 인한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의 원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글로벌화로 인한 과잉 생산력과 필요 이상의 과잉 소비, 이 모든 것이 수백만 년에 걸쳐서 일어나야 할 기후변화가 한 세대 안에 일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기후변화의 주범이라고 하더라도 생산과 소비를 줄여 나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수요를 새로 창출하여 과잉 생산력을 유지하는 것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운행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절제하고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면 항상 불황의 언저리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던 세계 경제는 그대로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기후 재앙 보다 경제 재앙이 더 빨리 찾아오게 됩니다.
낭비를 풍요로 착각하며 살아온 세계의 중산층이 기후 재앙을 바라보며 정신 차리고 소비를 절제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중독이든 금단현상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절제하지 못하면서 절제하지 못하는 세상을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후변화의 문제는 국경이 없는, 말 그대로 글로벌 문제입니다. 그런 만큼 어느 나라도 기후변화 대응에 앞장서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지도자도 세계인의 고통을 우리 국민이 앞장서서 지자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 회의가 아무리 열려도 고통을 나누고 함께 효과적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기도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대륙 전체가 물에 잠기거나 불길에 휩싸이는 대재앙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혹은 그 이전에 획기적 기술이 나와서 세계인이 쓰고도 남을 에너지를 주십사고..
오늘 소개하는 책은 환경 운동가들이 경고하듯 기후변화로 인한 문명의 종말이나 인류의 멸종 같은 대재앙이 코앞에 다가온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환경운동가들은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에는 관심이 없으며 스스로 관심을 끄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회적 관심은 쉽게 운동가들 자신의 권력과 돈이 됩니다. 때로는 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하며 종말이나 멸종 같은 협박을 버릇처럼 입에 올립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운동가가 아니고 실천가와 과학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