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못한 여성시인들을 떠올리며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잊혀진 목소리를 찾다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과도 같은 이 책의 제목은 퍽 낭만적이다. 애청하는 cbs 라디오 프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떠오르고, 나 역시 시를 잊은 채 살아가던 1인으로서 이 책의 제목이 반가웠다. 목차를 보니 어릴 적 교과서에서 접하고 애정하던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어, 오랜만에 명시들을 곱씹는 기회가 되었다.
책의 화두로 저자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의 말을 빌린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은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다.” 사람이란 정신없이 살아가다가도 이런 말을 들으면 문득 생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문득 나에게 “돈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인간답게 살아가는 거야”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가난한 선배가 떠오른다. 그 말에 잠시나마 내 마음이 얼마나 설렜던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지켜내기 쉽지 않은 가치다. 그걸 알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따라서 저자는 우리에게 요청한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시, 대신 읽어드립니다’ 컨셉으로 다가온다. 큰 카테고리- 가난, 순수, 이별, 사랑, 기다림, 부모, 민주주의 등- 키워드 별로 여러 시를 엮으며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온 명시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 윤동주 <별 헤는 밤>, 이형기 <낙화>,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기형도 <엄마걱정>, 천상병 <귀천> 등이 눈에 띈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라도 많이 알려진 시들을 중심으로 시 감상하는 법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성별의 쏠림 현상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소개된 주요 시인이 서른명 정도 되는데 여성 시인은 강은교, 이영도 두 명 남짓이다. 저자 역시 남성인 점, 실제로 이미 교과서에 실릴 만한 유명하고 굵직한 시들은 죄다 남성이 썼다는 점, 이 사회가 여전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라는 점이 이 책의 태생적 한계랄까.
어쨌거나, 저자는 각 시에 얽힌 ‘썰’들을 유려하고 흥미롭게 풀어낸다. 가끔은 신승훈의 노래와 <봄날은 간다>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컨텐츠를 예로 드는데,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아재미’는 어쩔 도리가 없다.(ㅋㅋ) 부모를 다룬 시에서 유독 아버지가 갖는 무게감 등 상징 의미에 집중하고(“거울 속에 아버지가 보일 때”) 어머니는 돌봄의 1차적인 책임을 지닌 ‘당연한’ 존재로 전제하며, 그들의 부재가 유년시절에 얼마나 큰 상실감과 고통인지 다루는 시(‘섬집아기’, ‘엄마걱정’), 또한 흔히 교과서에서 ‘시각을 청각화했다’며 시험문제로 단골 언급되는 김광균의 시 <설야>의 한 대목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표현을 그저 관능적이며 탁월하다고 감탄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따라서 어느 순간, 나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미처 회자되지 못한 여성 시인과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의 명시 산책을 끝내고, 이제는 내가 사랑한 여성 시인- 나혜석, 최승자, 실비아플라스의 시를 아주 오랜만에 꺼내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