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상수, 타인이라는 변수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1.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 지인이, 낮 시간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사방에서 개소리로 시끄럽다고 토로했다. 주인이 있으면 조용하지만, 주인 나가고 없는 집에서 개가 혼자 있으면 그렇게 짖는다나- 개주인은 아마도 밤에만 들어오는 것 같다며. 이 얘기를 듣던 다른 분은 이런 상황에서는 개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고, 일종의 동물학대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개주인은 자신이 떠나고 없는 집에 남겨진 개가 종일 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면 마음이 어떨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은,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걸까?
2.내가 사는 동네는 중국동포분들이 많은데 어린 자녀를 혼자 두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야기해준 분은 아이를 돌봄하는 데 있어서 국가 간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국의 일반적인 양육 방식이 한국사회에서는 방임으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문화적 차이보다는 경제적 차이가 더 큰,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했다.
3.SNS에서 친해진 육아동지를 최근 오프에서 만났다. 그가 속해있는 초산 쥐띠생 육아 커뮤니티의 최근 화두는 둘째를 낳을 것인지 하나로 끝낼 것인지 여부라면서, 자신은 후자의 삶을 선택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면서, 둘째를 준비하는 사람 중 불구덩이 속에 제 발로 들어가는 모양새로 보이는 몇몇을 언급했다(배우자와의 갈등 측면에서). 그녀는 엄마 자신을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그런 경우에는 더 낳지 말야아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조점은 전자보다 후자에 찍혀 있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한 존재를 책임지는 다양한 모습들을 접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경제적, 심리적 여건에 맞춰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자라온 방식과 남편이 자라온 방식의 격차를 조율하면서, 우리의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스럽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내 양육방식도 누군가의 눈에는 방임과 학대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격차는 기초 단위인 가정으로부터 재생산된다는 점이 항상 마음 아프다. 아이는 자신이 속한 환경에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전적으로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나의 삶은 항상 내가 주도해온 스무살로부터 시작됐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스무 살 이후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만난 사람들과 내가 선택한 삶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절대적으로 보이는 상수에 지배받지만, 성장하면서 언제든 변수-친절한 타인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낼 수 있다고, 내가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