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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30. 2022

나눔에 대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존재방식

모든 것이 교환관계로 수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나눔은 상상하기 어렵다. 생일을 타인에게 알리기 싫은 이유 중 하나로 ‘(생일을) 챙김 받으면 나도 챙겨줘야 하니까’라는 점에서 관계란 등가교환의 원칙이 통용되기 마련이다.


평소 나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선물을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평소에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한 번씩 깜짝 선물을 건네곤 한다. 그 순간 선물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 퍼지는 환한 웃음과 반가운 기색을 보는 것은 퍽 흐뭇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주는 것은 나눔일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스무살 초반, 가까운 한 사람이 보여준 행동이었다. 어느 날 친한 언니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 오는 길에 ‘원플원’으로 득템했다며 다짜고짜 팬티를 건넸다. 언니의 행동은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왜 때문에? 나라면 1+1 상품을 보면 ‘1+1’, 가격 합리성 때문에 그것을 구매하지, ‘덤으로 받았으니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언니는 항상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언니가 비싸고 좋은 물건을 남에게 선물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자신에게 생겨난 것이면 물건이든, 무엇이든, 나누려했다. 마치 ‘나의 것’과 ‘너의 것’의 경계선을 강하게 두지 않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나는 나의 것을 나눔하기 보다는 ‘선물’을 따로 준비했다. 나에게 나눔이란 우선 자신의 것을 확보한 뒤에도 존재하는 잉여분에 대한 분배를 뜻했다. 이를테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가기 전이면 내 몫을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분배하기 위해(다르게 말하면 ‘독박’ 쓰지 않으려) 오만원권 지폐를 만원으로, 만원권 지폐를 오천원과 천원권으로 교환해가던 나는, 매사 계산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언니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나눔이란 내가 넉넉해서, 여유가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이 진짜 나눔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를테면 나눔이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하는 것이라는 것. 나의 잉여가 아닌, 내 것 자체를 나누는 것. (덧붙여 그 언니가 건넸던 것이 팬티가 아니라 양말이나 손수건이었으면 그 감동이 반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한 사람에게 호구 잡힌 불쌍한 인생에 대한 우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등가교환을 기본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존재방식이란 득이 없고 밑지는 관계를 추구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로 느껴진다.


하지만 점점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를 모호히 하려는 그 태도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아닐까?

사진출처: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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