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흥디자인 Oct 25. 2020

파타야에서 쉬어 가기

더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해야 휴식이다



우리 부부의 여행 스타일은 한동안 무척 '한국적'이었다. 어디를 가든 간에 그곳의 유명한 곳은 모두 가야 했고 맛있는 것들은 모조리 섭렵해야만 했다. 우리의 설렘은 여행 계획을 짤 때 가장 빛을 발했다. 인터넷으로 여행지에서 꼭 가야 할 곳에 대한 검색을 하기 시작하면, 완벽한 여행 계획을 위한 여정의 문이 열린 셈이다.



검색 내용을 바탕으로 차례대로 구글맵에 위치를 찍어놓는다. 구글맵을 기반으로 숙소를 정하고 일정을 짠다. 갈 곳을 정하는 것부터 일정을 짜는 것까지, 짧으면 1~2주, 길면 몇 개월 동안 여행을 계획한다. 어떨 땐 너무 많은 정보를 봐서, 여행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그곳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 여행지에서 그 계획이 완벽하게 완료될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미리 찾아놓은 정보와 현지 정보가 맞지 않아서 계획한 일정이 틀어질 때에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행이 어느 순간 일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출장을 가듯 여행을 떠나게 된 지 몇 년이 흐르자,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남들 눈에는 노는 것처럼 보이는데, 놀지 못한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싶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마침 우리는 방콕을 여행 중이었다. 방콕 다음에는 파타야를 여행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된 거 파타야에서 신나게 아무것도 안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란 마음으로 여행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파타야는 첫 방콕 여행을 했을 때에 함께 묶어 여행했던 곳이었다. 패키지여행이 그러하듯, 도시 관광 후에 휴양지를 묶어 여행을 시키는 계획표에 파타야가 있었던 것이다. 첫 방콕 여행도 그러했지만, 첫 파타야 여행도 사실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아무래도 남이 하라는 대로, 내 의지가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렴풋이 버스를 타고, 또 바닷가에서 놀았던 기억은 있지만 파타야에 대한 정보는 그게 다였다. 힘들게 갔는데, 기억이 없다니...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방콕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파타야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 여행 계획에 넣었다.




휴양으로 살아가는 파타야




방콕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가면 파타야가 나온다. 화려한 도시 분위기였던 방콕과 달리 파타야는 철저하게 휴양을 위한 도시다. 저 멀리 바다가 넘실거린다. 고급 호텔과 리조트들이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있다. 사람들이 거리에 활발히 다니는 시간은 해가 떨어지는 오후부터다. 모든 것이 휴양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도시처럼 원활한 인프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단,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없다. 오로지 감으로 길을 건너는 것이 무서웠지만 오토바이 운전자와 눈을 맞추고 걸어가면 치일 염려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조금씩 거리에 적응해갔다.





도로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개발이 들쑥날쑥한 분위기였다. 리조트 부근에는 쇼핑몰들이 들어섰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낙후된 건물이 너무 많았다. 과연 이런 곳이 영업을 할까? 싶은 가게에도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한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태국의 인기 여행지인 만큼, 번쩍이는 쇼핑몰이 계속 세워지고 있었다. 동남아라고 해서 무조건 낙후된 건물에서 물건을 사고 위생이 의심스러운 음식을 먹는 건 옛날이야기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방콕에서 짐이 늘어날까 봐 구입하지 못했던 태국 특산품도 사고 에어컨이 나오는 깔끔한 푸드코트에서 현지식을 먹으며 쾌적한 관광을 했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몇 년 간 열심히 움직이는 것을 여행이라 여겼으니 파타야에서 그냥 풀어져 있는 경험이 무척 어색했다. 서양 사람들처럼 하루 종일 수영장에 죽치고 있어도 좋으련만.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래도 파타야에 오면 대부분 한다는 산호섬 탐방이나 해양 액티비티는 하지 않았다.





파타야 자체의 해변은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물놀이를 제대로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주변 섬을 가야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파타야에만 있었으니, 우리 부부에게는 어느 정도 게으름을 피운 셈이 되었다. 그냥 느지막이 일어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해안가를 구경하다가 쇼핑몰에서 쇼핑을 했다. 식사는 주로 리조트 주변에 있는 식당이나 쇼핑몰의 푸드코트를 이용했다. 그래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안 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게으름도 피워본 놈이 더 잘 피우나 보다.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던 파타야의 밤



방콕에서는 밤에 정말 잘 돌아다녔다. 오히려 낮보다 조금이나마 선선한 밤을 반가워했다. 그래서 유명한 야시장도 가고 밤 풍경을 즐기며 걷기도 또 많이 걸었다. 좋은 루프탑 바도 많아서 밤이 정말 충만했었더랬다. 파타야의 밤도 방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밤이 되어야 활기를 찾는 시내의 모습이 딱히 신기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파타야의 밤은... 방콕과 너무 달랐다. 트랜스젠더들이 꾸미는 쇼가 열리는 극장에 불이 켜지고, 서양 남자들이 모여드는 바에도 하나둘씩 불이 켜진다.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이 태국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모습이 너무 당연한 곳이었다. '렌트 걸'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타야는 내가 들렀던 태국의 다른 관광지보다 훨씬 독특한 여행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낮에는 물놀이나 섬 탐방을 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고 유흥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듯했다. 앳된 태국 여자들이 서양 남자들에게 술을 서빙한다. 붉은 불빛 아래에서 이상한 춤을 춘다. 오토바이는 위협적으로 씽씽 달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태국인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한다.... 낮과는 사뭇 다른 파타야의 모습에 첫날부터 무척 당황스러웠다. 물론 태국의 다른 도시들도 이런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타야는 스스럼없이 유흥가가 중심을 차지하고 그 끈적한 화려함을 당당히 표현했다.





다른 세상처럼 여겨지던 밤 풍경에 당황하다가, 어렴풋이 처음 파타야를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패키지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며 가이드가 트랜스젠더 쇼를 억지로 구경시켜줬던 기억 말이다. 이런 쇼들은 쇼보다, 쇼가 끝난 후에 무희들과의 포토타임이 더 중심인 듯했다. 깜쪽같이 여성스러운 이도 있었지만 짙은 화장과 독특한 의상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가까이 와서 사진을 찍으라며 손짓하는 무희들과 정말로 사진을 찍으려면 일정 팁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 팁은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고 몸을 가꾸는데 쓰인다고... 쇼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포토타임은 정말 싫었다. 싫은 기억 때문에 파타야의 여행 기억이 그리도 흐릿했나 싶었다.





파타야에서 개운치 않은 기억이 떠오른 이후에는 밤에 나가는 것을 꺼렸던 것 같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 쉬었다. 되도록 사람들이 많은 유흥가는 피했다. 그야말로 반쪽짜리 여행만 즐긴 셈이다. 그래도 다른 여행보다 잠도 많이 잤고 술도 덜 마셨으니 비교적 건강한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밤 분위기는 우리와 맞지 않았으나 낮에는 휴양지로서는 완벽한 곳이 파타야였다. 이곳 덕분에 계획으로 빡빡했던 머리를 풀어지게 만들고, 다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수영장에서 원 없이 수영을 하고, 먼바다를 보며 넋을 놓았던 기억은 아름답게 남았다. 넘쳐나는 시간 속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섬세했다. 사실, 모든 여행지가 좋을 순 없다. 다시 파타야를 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태국이라는 나라의 색다른 면모를 보고 느꼈던 기억은 고이 간직하려 한다.




이전 09화 치앙마이에 살어리랏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