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있어도 질리지 않는 곳
나는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질리지 않고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좋아하는 노래는 질릴 때까지 무한 반복해서 듣고,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먹는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좋아하는 여행지는 계속 가는 편이다. 싱가포르가 그러했고, 하와이가 그랬다. 아, 방콕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2년 전 여행으로 인해 치앙마이를 추가하기로 했다.
치앙마이를 가게 된 건, '한 달 살기' 열풍 때문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방콕이나 파타야, 푸껫도 아닌 곳이 왜 한 달 살기의 명소가 되었을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결국 또 티켓을 사고, 숙소를 골라냈다. 그래도 첫 여행지니까 잘 모를 수도 있으니 조금 짧게 있어볼까? 싶어서 9박 10일 정도로 계획했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일정을 너무 짧게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 집어서 말을 하긴 힘들지만, 여행 이틀 째인가 느꼈다. 아, 여기는 오래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구나...라는 걸 말이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든다니. 그래서인지 치앙마이에서는 여행 전에 치밀하게 짜 놓았던 여행 계획이 의미가 없었다.
종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곳
사부작사부작 걸어서 보이는 사원에 들어가 그곳의 모습을 본다. 검소한 거리 분위기에 비해, 사원의 분위기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번쩍이는 금 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무에 걸려있는 글들을 읽는다. 사원 곳곳에서 보이는, 주황색 승복을 입고 걸어가는 승려들을 본다. 사원을 찾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본다. 어릴 때부터 천주교인으로 살아왔지만, 나는 이들처럼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냥 기도를 하라니까 하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허술하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샌가 무교에 가까워졌지만. 이제는 주 기도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날라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열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유명하다는 사원에 들를 때마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현지인들의 열정 어린 행동들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 무언가에 대해서 저들처럼 열정적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어느 순간 저절로 마음에 떠올랐을 때, 그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 느낌이었다.
마켓이 없으면 치앙마이도 없다
치앙마이는 마켓이 엄청 많다. 밤에도 열고 아침에도 연다. 아니 사실 낮에도 연다. 그냥 일상이 마켓이다. 하루 종일 마켓이 성행하는데도 마켓마다 사람이 있다는 점이 신기할 뿐이다. 그래서 치앙마이에서 재래시장의 모든 것을 알게 된 기분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여느 동남아의 마켓처럼 기념품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마켓의 분위기와 파는 물품이 달라진다. 그래서 잘 찾아가야 한다.
특히 주말 아침에 여는 마켓은 결이 다르다. 치앙마이라고 하면 떼려야 뗄 수 없는 빈티지 제품도 팔고 이곳의 특산품인 어두운 쪽빛의 날염 제품도 판다. 아예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을 홍보하러 오기도 한다. 현지인들은 마켓에서 머리도 자르고 한가로이 친구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아침도 해결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 마켓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밤의 마켓은 어둡기도 하거니와 사람이 너무 붐벼 물건 구경을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에 끼여 다니는지 헷갈리는데, 새벽같이 열리고 낮에는 파장하는 아침 마켓에서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아침을 건설적으로 시작한다는 보람이 있다.
아침 마켓 한구석에서 진행되던 유기농 마켓에서는 현지의 신선한 채소들을 만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호텔이 아니라 조리가 가능한 에어비앤비에서 묵었더라면, 아마도 마켓에서 신선한 재료를 사는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한 달 정도, 아니면 그 이상 머무르며 아침 마켓에 들러 일주일 먹을 식재료를 사고 예쁜 식기들을 산다. 그리고 마켓에서 산 것들로 한 끼 식사를 꾸민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여행객이 살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즐거운 상상을 채울 수 없다는 점이 여행 내내 아쉬웠다. 치앙마이에서 여행을 하는 것보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마켓 때문일 것이다.
아티스트들이 사랑하는 도시, 치앙마이
디지털 노마드들이 사랑하는 도시 중 치앙마이가 있다는 것이 우리 부부를 그곳으로 여행하게 만든 이유였다. 무엇이 그리도 좋길래 사람들이 놀면서 일하려고 찾아가는 걸까. 특히 작가, 아티스트들이 머물기 좋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 무척 궁금했다. 짧게나마 치앙마이에 머무른 결과, 그 이유를 알아냈다. 치앙마이는 장기 여행자들에게 최적인 동네였다.
1. 인터넷이 빠르고, 코 워킹 스페이스가 많다.
2. 물가가 저렴해 장기로 머물기 좋다
3.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 (예를 들면 사원, 푸르른 자연 등)이 많다
4. 문화예술을 즐기기 좋다
마지막 4번째는 확실히 태국의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는 부분이었다. 일단, 치앙마이의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다. 그리고 태국의 유명한 예술가들을 배출해낸 치앙마이 대학교도 있다. 그래서인지. 복합 문화공간이나 갤러리가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발에 챌 정도다. 태국과 전 세계에서 작가들이 많이 모이니 원 데이 클래스가 열리기도 하며 작가들의 작업 공간도 방문해볼 수 있다.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하면서 작가들의 원 데이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보에 무척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느라 하지 못했죠)
반 캉 왓, 페이퍼 스푼 등 복합 문화공간에 들러 감성을 충전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한국에도 수많은 복합 문화공간이 있건만, 치앙마이의 그것과는 뭔가 다르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예술보다는 상업적인 부분이 더 강조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치앙마이의 공간도 약간은 상업적이긴 했지만, 한국보다는 덜 한 편이었다. 오히려 자연과 예술의 오묘한 조화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다양한 매력이 있는 카페들 중 한 곳을 골라 커피를 마신다. 커피 원산지로 유명한 치앙마이의 커피는 순수하게 맛있다. 그리고 갤러리나 복합 문화공간에 가서 감성을 충전한다. 아니면 미뤄뒀던 일을 하기도 한다. 또는 사원 구경만 해도 좋았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면 금방 저녁이다. 치앙마이에서는 하루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서 다들, 오랫동안 머무는 거구나... 오래 머물러도 매일이 차분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치앙마이에서 많은 것에 영감을 받았다. 채식이 유명한 동네라서 채소를 모티브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치앙마이의 작가들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 것을 보며 나만의 스타일이 뭘까 고민한 결과, 단순하고 아기자기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전에도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치앙마이 여행 이후에 더 심화된 것 같다. 내가 보는 물체를 나만의 감성으로 단순화시킨다. 단순한 형태에 어울리는 색감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게 되었다. 모두 감성과 예술이 강처럼 흐르는 곳에서 일상을 보냈던 덕분이다.
여행을 다녀온 지 2년이 흘렀다. 다시 가고 싶지만, 코로나 사태로 하늘길이 막히고 국경이 문을 닫았다. 집 안에 갇혀 코로나 블루를 느끼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다시 치앙마이가 떠올랐다. 불안함과 우울함을 해결해 줄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은 곳.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그 작은 도시가 그립다.